청어람 매거진

[이슈 따라잡기] 주님의 이름으로 ‘혐오’ 하십니까?

이 코너는 온/오프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갑론을박 중 한번 생각해 볼 내용을 중심으로 꾸며 보는 코너이다. 이와 관련한 투고와 반론을 환영한다.

지난 4.13 총선은 여러 가지 이변을 낳았지만 개신교 입장에서는 간발의 차이로 비례대표 배출에 실패한 기호5번 기독자유당의 득표력을 놓고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이들의 득표율 2.63%에 기호 13번 기독당의 0.54%를 더하면 3.17%로 정당 컷오프 수준을 넘어선다. 제20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개신교인이 25%를 넘기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단순히 개신교의 정치 진출이 부족했기에 나섰다고 보기는 어렵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들이 전면에 내건 구호가 그 지지의 배후 동기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 양 당이 정책(?)으로 내건 구호들의 최전선에 동성애 반대, 이슬람 반대, 종북좌파 척결 등을 찾을 수 있다.

기독자유당

기독자유당과 기독당

왜 혐오하는가?

때마침 청어람 ARMC는 2016년 상반기에 ‘한국사회의 혐오와 포비아를 생각한다’를 주제로 4회에 걸친 월례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강좌 자세히 보기] 이슬람, 동성애, 여성, 종북을 다루고 있으니 같은 주제를 놓고 ‘기독 정당’들과 정확하게 대척점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이슈가 제기되는 맥락은 차이가 있겠으나 이 전체 경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혐오(disgust)’란 감정으로 어렵지 않게 요약 가능하다. 혐오란 ‘어떤 대상을 향해 느끼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뜻한다. 영어 단어 그 자체가 종종 쓰이는 대로 ‘토할 것 같은 상태’를 일컫는다. 온갖 종류의 더러움, 추악함, 불결함 등을 의미하고, 배설물, 부패, 악취 등을 곧바로 연상하게 하는 감정이다. 학자들은 인류가 스스로를 오염, 부패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감정을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시카고대학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혐오’의 문제를 깊이 검토한 대표적 사상가이다. 그는 “혐오란 배설물, 혈액, 체액 등 인간의 동물성을 일깨워주는 요소에서 비롯하는 원초적 감정인데, 주로 죽음이나 부패와 관련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동물적 속성을 기피하려는 경향을 갖는데 이런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가 이성적 검토를 거치지 않고 다른 대상으로 확장될 때 이를 ‘투사적 혐오(projected disgust)’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투사적 혐오’는 혐오 대상과 유사한 것 역시 혐오스럽게 여기거나, 혐오 대상과 접촉하면 오염/전염된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작동할 때에는 망상(delusion)의 메커니즘이 개입한다. 사람에게 ‘냄새가 난다, 불결하다, 비열하다’ 등의 표현을 써서 혐오감을 표출하는 것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 유대인 차별, 흑인 차별 사례에서 흔히 발견된다. 상대를 역겹다고 느끼는 속성으로 환원해버리고 이를 감정적 차원에서 반응하는 태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망상은 ‘타자는 더럽고 나는 깨끗하다’고 여기는 이중의 거짓된 믿음에 근거할 때라야 가능하다. ‘투사된 혐오’는 ‘사회적 망상’과 연계되면서 소수자를 손쉽게 낙인찍고 격리시키는 매우 강력한 도구로 작동한다.

혐오, 증오, 포비아의 상관 관계

자, 이런 ‘혐오’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첫째, ‘원초적 혐오감’에 대한 집요한 호소가 두드러진다. ‘이슬람 반대’ 게시물에 사용되는 공포의 시각적 전시 행위를 보라! 처형 장면, 훼손된 시신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이를 이슬람 그 자체와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일관되게 나타난다. ‘동성애 반대’ 게시물들은 과도하고 세밀하게 동성 간 성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이성애도 그런 방식으로 묘사하면 충분히 혐오 대상이 될 것이다. 동성애자란 반드시 비정상적으로 욕망에 사로잡힌 성중독자이거나 성도착자, 소아성애자, 동물 성애자로 그려진다. ‘종북좌파 척결’에서도 역시 북한사회의 고문, 처형, 패륜 등의 야만적 행태가 두드러진다. 유의할 지점은 이런 적나라한 혐오의 전시를 위해 종종 팩트가 편의적으로 왜곡되거나, 한 사례로 전체를 대표하는 침소봉대가 일상화된다는 점이다. 사건 자체의 진위보다 시각적으로나 서술적으로 얼마나 드라마틱한 충격을 줄 수 있는가에 주력하는 듯한 인상이 짙다. ‘이런 진실 앞에서 왜 당신은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가?’라며 비분강개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사람들 안에 내재된 ‘원초적 혐오감’을 어떤 대상에게 ‘투사된 혐오감’으로 성공적으로 연결 짓게 되면 하나의 프레임이 완결된다. 이 즉각적인 혐오의 폐쇄회로에 일단 들어가면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없다. 그 바깥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진실을 모르거나,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거나, 혐오의 대상에 동조하는 더욱 혐오스러운 자들로 간주될 따름이다. 이 적나라한 혐오의 전시만 완화되어도 우리는 이 주제를 조금 더 합리적으로 토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혐오스러운 대상을 방치할 경우 오염 · 전염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곧바로 따라붙는다. 이는 앞서 언급한 이중의 망상(double delusion) 메커니즘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깨끗함’과 ‘저들의 더러움’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우리도 깨끗하지 않고, 저들도 더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투사적 혐오’를 내면화하고 나면 상대방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간주하기는 힘들다. 저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타자이고, 절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여기서 오염 · 전염은 실질적인 공포가 되고, 우리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들을 끊임없이 격리하고, 분리하고, 색출하고, 추방해야 한다. ‘동성애 반대’에서 끊임없이 AIDS 전염 위협을 강조하거나, 급기야는 드라마만 보고도 동성애가 전파될 수 있다는 식의 “동성애 드라마 보고 게이 되면 책임질건가?” 같은 구호도 등장하는 것은 전염성에 대한 공포가 기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반대’는 유학, 이민, 비즈니스 등 이미 피할 수 없는 무슬림과의 접촉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오염시킬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국내의 다문화 가정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며 ‘단일민족’이 해체된다고 개탄하며 ‘다문화 XX’가 욕이 되는 현실과 멀지 않다. ‘종북좌파 척결’에서 이념적 세뇌에 대한 우려는 좌파 운동권과 접촉만 하면 종북좌파가 된다는 두려움 역시 그러하다. 왕년의 운동권이 세속화되었거나, 북한이 자본주의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이 가상의 ‘이념적 오염’이 더 심각한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는 전혀 검토되지 않는다. 어떤 대상을 혐오하면서 ‘바이러스’에 비유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일관되고도 그 감정의 작동 방식에 부합하는 전략일 수 있다.

셋째, 사회적 갈등은 혐오의 대상들이 수동적으로 있지 않고 조직화와 제도화될 가능성을 보일 때 대대적으로 증폭된다. ‘투사적 혐오’의 대상이 된 사회적 소수자 그룹은 일방적으로 혐오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일 수 있지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증오(hate)’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증오’는 단순한 미움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제거하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는 적대감’이다. 공존 불가능한 대상을 향한 감정이다. ‘이슬람’은 저 멀리 있을 때는 선교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탈레반이나 IS 같은 공존 불가능한 테러집단이거나 한국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 오일 머니와 결혼이민, 불법체류 등의 전략을 활용하여 조직적으로 몰려오고, 수쿠크법이나 할랄 단지, 교육기관 등을 설립하여 제도적 진출을 하고 있는 조직적 위협으로 간주된다. ‘북한’은 제 나라 백성들은 굶겨 죽이면서 수시로 미사일이나 쏘아대는 망나니 국가로, 붕괴되어야 할 적대적 대상이다. 이에 찬동하는 좌파들이 정당과 언론, 기업, 시민단체, 학교 등 온갖 사회조직에 침투해 있다면 여간 큰일이 아닌 것이다. 이들이 한국사회에 제도적 기반을 확장해 나가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적 행위에 나서는 것은 심대한 두려움이 된다. ‘동성애’는 더욱 심각하다. 이들은 외부에 있지 않고, 주변 어디에나 잠복하고 있는데다가 동성결혼, 차별금지법, 인권헌장, 퀴어 축제 등을 통해 조직화되고 제도적 보호막을 갖춰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막을 수 없다면 이 사회는 심각한 붕괴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란 확신에 이르면 ‘포비아(phobia)’ 즉 공포증이라 부를 만한 정서적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면, 이를 정치적 자원으로 삼으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이슈들이 미국에서는 정당의 득표 전략이나 사회적 보수를 동원하는 도구로 곧잘 쓰이는 이유다.

퀴어반대카톡

2016년 퀴어 축제는 6월 11일 서울 광장에서 개최하기로 확정되었고, 개신교를 중심으로 반대 청원 서명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혐오에 물든 기독교, 해결책은 없나?

이 모든 과정에서 왜 개신교가 유독 이런 ‘혐오 캠페인’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개신교가 당면한 내부적 문제로 인해 사회적 신뢰도와 평판을 잃고 수세에 몰려 있는 와중에 이 주제들은 공세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이슈라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종교가 사회 규범과 윤리적 감수성에서 가장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개신교가 한국사회에서 보수 세력의 거점을 자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보수적 가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사안들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인식 구조가 동일한 패턴을 갖게 되면서 ‘종북 게이’라든지, ‘좌파와 이슬람이 손을 잡았다’는 식의 견강부회(牽強附會)도 가능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개신교계 전체가 이런 흐름에 편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SNS를 통해 ‘기도 제목’이란 이름으로 혐오 감정이 원색적으로 유통될 때 이를 ‘종교적 열정’으로 간주하여 방치하거나 확산에 기여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번 총선 결과는 개신교가 이런 방식으로 혐오 감정을 자극한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이 최대 70만 표 이상을 얻는 정도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재 우리가 선 상황이 이러하다면,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일까? 앞서 우리가 살펴본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타자를 향한 ‘투사적 혐오’를 걷어내고 그들과 제대로 대면하는 것이다. 요즘 같은 정보 폭증의 시대에 찾으려고만 하면 엄청난 양의 지식과 정보에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어진 증거나 정보 중에서도 자기 소신에 부합하는 것만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성’을 드러내거나, 이를 편의적으로 조합한 거대 서사로 ‘음모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제대로 된 증거와 합리적 논증이 모든 논의의 장을 주도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이와 동시에, 혐오란 감정 그 자체를 단지 이성적으로 해명한다고 바로 원인무효로 소멸되는 것이 아님도 직시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이를 유지 · 강화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쉽게 변하지 않고, 남이 오류를 지적한다고 바로 교정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사람들이 도덕적 판단을 할 때 대체로 진보가 ‘공평(fairness)’과 ‘배려(caring)’라는 가치에 치중한다면, 보수는 ‘충성(loyalty)’, ‘권위(authority)’, ‘성스러움(sanctity)’ 등의 기준도 중요하게 사용한다고 말한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단순히 정보량의 차이는 아니고 판단 기준의 상이함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당사자의 내면적 성찰의 결과로 얻어진 깨달음이 아니라면 외부의 압박만으로 바람직한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회적 혐오’의 폭증 앞에 비로소 무엇을, 왜, 어떻게 혐오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묻게 되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성찰(reflection)’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성찰은 언제나 사후적이다. 한국사회 전반이 ‘사회적 혐오’의 문제를 겪고 있고 한국 개신교가 이런 혐오의 근거지이자 주도자로 기능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에 대해 무얼 말해주는 것인가? 우리의 뼈아프게 캐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새끼

이런 풍자적인 이미지가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있다.

특히 이 대목에서 개신교인들은 신앙의 기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행적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일관되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가 안식일을 범하고, 정결 예법을 어길 때마다 경건한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기겁을 했다. 그가 문둥병자를 고치고, 혈루병자에게 손을 대고, 세리와 창녀와 어울릴 때마다 그 부정함을 개의치 않은 탓에 그는 ‘죄인들의 친구’란 별명을 얻었다. 그가 세리와 창녀와 어울렸다고 매국과 매매춘을 승인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당대의 성스러움과 속됨, 깨끗함과 추악함의 경계를 허물었다. 간통죄로 끌려나온 여자를 둘러싼 정죄자들에게 예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로 무장해제를 시킨 것은, 우리는 깨끗하고 저들은 추악하다는 윤리적 이분법이 진실이 아니란 점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 결과, 그는 지도층과 종교인들에게 신성모독이자 윤리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따를 윤리와 신앙적 열심이 어느 지점에서 도출될 것인지는 여전히 토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준 예수의 모범을 따르자면 적어도 그 방법이 ‘혐오’의 감정에 의존하는 것일 수는 없다. 본격적 논의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타자와 대면하기 전에 우리가 해소해야 할 큰 반성의 질문 앞에 먼저 서보는 일이 꼭 필요한 시절이다.

 


양희송
양희송

청어람 대표. 복음주의 운동가. 몇권의 책을 썼지만, 좌우명은 "노는게 제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