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이슈 따라잡기] 목회자 성범죄, 폭로 넘어 생각하기

지난 8월 2일 뉴스앤조이 사이트에 ‘유명 청소년 단체 목사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발행되었다. 라이즈무브먼트 이동현 목사가 고등학생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기사 보기 : 유명 청소년 단체 목사의 두 얼굴]

뜨겁게 지리멸렬한 ‘목회자의 성범죄’ 사건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각종 SNS에서의 반응도 뜨거웠다. 1999년 분당 지역 청소년 연합을 위해 세워진 ‘비틴즈’에서부터 ‘라이즈업무브먼트’로 이어지기까지 무려 17년간 청(소)년 사역에 큰 영향력을 끼쳐온 단체를 대표하는 목회자의 이면은 마치 장판 밑 바퀴벌레들의 흔적처럼 추악했다. 당연히 거센 비판과 각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목회자의 성범죄 문제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은 일종의 ‘클리셰’를 만나게 된다. 이동현 목사의 성범죄를 대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의 ‘행위’가 가십처럼 둥둥 떠돌고, ‘이것이 어디 이동현만의 문제겠냐’며 남성/목회자들의 반성과 성찰이 이어진다. 재빠르게 ‘구체적인 지침’도 공유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분노하며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중에는 타락을 경계하며 음란을 멀리하자는 경건한 다짐을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동현 목사의 치리, 법적 처벌 문제도 쟁점이다. 이런 흐름은 지겹도록 익숙하다.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이 흐름이 진보 없이 반복되는 풍경, 그 자체이다.

사진: 채널A 유튜브 영상 갈무리

‘전병욱 성범죄’ 사실이 밝혀졌을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자. 많은 그리스도인이 공분했고, 이는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그 공분의 흐름에는 어느 목사를 중심으로 결성한 인터넷 카페가 큰 역할을 했다(이 카페의 활동 내용은 나중에 <숨바꼭질>(대장간)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확보하여 폭로하는 방식으로 전개했다. 이 방식은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었지만, 당시 나는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런 방식의 폭로가 주의를 환기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성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남성/목회자 그룹이 문제 해결의 주체로 서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과 연대하여 <전병욱 사태를 보는 또 하나의 시선 –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교회 성폭력, 그 현실과 대안 사이>라는 토론회를 열었다. 그 토론회의 핵심은 간단했다. 남성 중심적 폭로 형태가 아닌 피해자 인권을 고려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며 이는 곧 성범죄에 관한 상담 기반, 제도 마련을 위한 고민으로 흘러 가야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토론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토론회 자료 보기] 

이동현 목사의 성범죄가 ‘전병욱 성범죄’와 양상은 다를지라도 사건 이후 전개 양상은 비슷하다. ‘사건’은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방향’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실천 해야 할까? 몇 가지 쟁점을 정리해보았다.

1. 이 사건은 성적타락과 음란의 문제가 아니다

목회자라는 지위, 남성이라는 힘에 의한 범죄행위며 ‘어느 타락한 미친놈’의 범죄가 아닌, 그런 지위와 힘을 가진 모든 존재의 문제다. 이 사건을 성적타락과 음란의 문제로 규정지어버리면 야동 본 것 회개하고, 순결의 미덕 강조하며 조심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데 이건 매우 익숙한 남성(가해자) 관점의, 나이브한 해결책이다.

교회 내 성범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상식과 법으로 처벌해야 하는 범죄를 신앙의 문제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이동현 목사를 처벌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당사자와 피해자, 사실을 인지한 단체는 ‘각서’로 은폐했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는 범죄와 분리될 기회를 갖지 얻지 못한 채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이것은 피해자는 물론이고 가해자가 죄를 인지하고 돌이킬 기회를 박탈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 내 성폭력 문제가 발생할 때 회개와 각성보다(그건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세요) 처벌과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교회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지긋지긋한 관절염’처럼 터져 나오는 말이 있다. “목회자도 사람인데… 목사도 남자인데…” 바로 그거다. 사람이고,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성범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해야 한다. 신앙은 나중 문제다. 사회적 상식과 법으로 처리하면 간단한 일을 자꾸 신앙으로 퉁치려니 범죄가 뻔뻔하게 알까기를 하는 것이다. 이동현 목사는 그런 기독교 영역의 생리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범죄가 폭로되었을 때 “젊은 날의 실수”라 인정한 후, 조직을 동생에게 양도하고 한 발 물러섰다(대회도 빠른 속도로 취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사탄과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을 정해줬다. 그러면 싸움은 이동현 목사와의 싸움이 아니게 된다. 사탄이라는 외부의 적에 지지 않기 위해 신앙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뭉치게 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 가해자는 사라진다. 영적 권위를 가졌다는 사람들이, 신앙을 이용해 이런 식으로 죄를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다. 나는 이런 사건이 드러나면 오롯이 가해자에게 집중했으면 좋겠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누군가 헛소리를 하면 “응. 알았어” 응수하고 돌 던지면 된다.

철컹철컹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2. 그럼에도 ‘신앙’을 성찰해야 한다

해당 기사를 읽으며 “마지막이라며 해외로 불러냈던 이동현 목사는 또다시 A와 만남을 시도했다. A가 전화를 받지 않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니 꼭 전화하라”는 메시지를 담아 메일을 보냈다. A는 그때 처음으로 이동현 목사가 신앙적인 말로 자신을 조종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부분에서 탄식이 흘렀다. 성폭행이 진행되었던 몇 년간, 자신의 삶이 파괴되도록 그 목회자가 ‘신앙적인 말로 자신을 조종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니! 그렇게 교육을 받아온 탓이다. 이동현 목사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네가 입을 뻥긋하면 사탄이 그 말을 이용해서 우리 사역을 망친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걸 참아라. 너 한 명만 참고 견디면 성령을 훼방하지 않게 된다”는 말로 A를 영적으로 옭아맸고,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네 인생은 망한다”는 말로 육체적으로 단속했다. 이는 영혼과 육체에 가한, 용서받지 못할 폭행이다.

성폭행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가 ‘신앙’인 경우가 이 사건 뿐이겠나. 목회자의 권위, 남성이라는 절대적인 힘, 여성을 향한 차별과 억압의 체계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견고하게 지켜지는 현장, 그 한가운데 우린 서 있다. 이것은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제도를 견인하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제발, 목회자의 헛소리, 성경 들이밀며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차별하는 언어를 죄의식 없이 남발하는 ‘신앙’에 속지 말라. A는 결국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과 상담을 통해 이해받고 용기를 냈다고 한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문제를 안겼지, 제대로 된 해결을 하는 곳이 못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 성폭행 문제를 제대로 다룰 기관도 변변하게 없고, 드러난 사실도 제대로 처벌이 되지 않는 폭력적 공간이 바로 교회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신앙의 문제이며, 교육과 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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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윌슨하트그로브,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 비아, 167쪽

3. 결국, 교육과 제도의 문제다

이 사건에 관한 무수한 말들이 한창 쏟아지던 8월 4일, 피해자이며 증언자인 A의 편지가 공개되었다. [기사 보기 : 이동현 목사 피해자 A가 드리는 편지] 모두가 제각각 손가락을 뻗어 어딘가를 가르치며 이것이 옳다, 주장할 때 A는 단호하게 정확한 지향을 밝혔다. 그것은 제도와 교육의 문제였다. ‘각성한 개인’보다 ‘합리적인 제도’를 더 신뢰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A는 명백히 옳다.

물론, 이 제도의 문제가 이전의 성폭행 사건 때 언급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은 잘못이 드러난 목회자 ‘치리’의 문제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물론 필요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며 이런 해결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성범죄를 저지른 목회자에게 분노하며 치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선한 (남성)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권력과 힘의 구도에서 상대적 약자 입장인 여성을 위한 성 평등과 성교육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어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문제 해결 과정에서조차 당사자이며 주체일 수 있는 여성의 목소리는 소거되었고, 배제되었다. 정의롭다고 여기는 주장조차도 이렇게 불평등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A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서 숙고하며 교육과 제도에 관해 고민하는 방향으로 이 사건의 논의가 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동현 목사를 치리하는 문제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풀되(이 제도도 매우 목회자 중심의 부족한 제도다), 교회학교, 교회나 신학교 등에서의 성 평등 및 성범죄 예방 교육을 의무화해야 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전문 기관이 필요하다. 교회 내에는 남성중심의 일방적 논의 구조(당회나 제직회 등)가 아니라, 보다 다양한 입장이 반영될 수 있는 논의 구조(청년, 여성 등 당사자성을 가진 주체)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신앙을 근거로 성차별이나 혐오를 조장하는 교육은 제대로 망신을 당하여 퇴출당해야 마땅하다. 안 그러면 교회 몰락의 강력한 원인이 될 것이다.

듣지도보지도말하지도말라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생각하자면, SNS를 중심으로 흐르는 분노와 성찰, 기사를 양산하는 언론의 관점에 다소 아쉬움을 느낀다. 관음증을 자극하는 기사나 극단적인 주장은 멈추고, 이것이 그동안 문제의식 없이 굳어졌던 부당한 목회 권력과 잘못된 신앙, 가부장/남성중심의 사고체계와 구조, 여성을 ‘성적 도구화/대상화’하는데 아무 문제 의식없는 젠더 불평등에 기반을 둔 예고된 범죄임을 자각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해 담론을 형성하고 논의의 물꼬를 터야 할 것이다. 그래야 A가 더 이상 피해자로 머물지 않을 수 있다. 이 글이 그런 일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A를 더이상 ‘피해자’로 호명하지 않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A에게 큰 빚을 졌다. A의 편지 중 마지막 부분을 돌려주고 싶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감히) 당신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오수경

청어람ARMC 편집장. 나이 먹다 체한 30대, 비혼, 여성이며 페북 잉여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