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권연경의 히브리서 산책] 1.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히브리서

'히브리서’는 한 편의 장대한 설교와 같은 구성, 종교적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언어의 측면에서 신약의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책'으로 여기지기도 합니다. 숭실대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권연경 교수가 히브리서와 독자 사이를 연결하는 안내자로서 '히브리서 산책'을 연재합니다.

‘히브리서’를 열며

히브리서는 여러모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당혹스럽게 한다. 다소 난해한 글이라 잔뜩 긴장 되지만 그만큼 흥미롭기도 하다. 신약 성서의 책들이 다 그렇겠지만, 히브리서 역시 나름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달리 발견하기 어려운 색다른 그리스도를 여기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그 어떤 인물들보다, 아니 하늘의 천사들보다 더 탁월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그 시험에서 승리하신 승리자, 우리의 연약함에 깊이 공감하시며 우리를 보다 성숙한 곳으로 이끄시는 선구자, 자신의 피로 구약의 짐승 제사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려 새 언약을 세우신 대제사장.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독특한 화풍의 초상을 그리며 그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그 구원에 참여하는 우리의 믿음을 심오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저자를 바울 및 요한복음의 저자와 더불어 신약성서 속 3대 신학자 중 하나로 꼽는다. 히브리서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학자들의 이런 평가가 결코 전문가들만의 요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감할 것이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히브리서?

기대감이 크지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히브리서는 낯설다. 목회자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신약성경의 한 부분이니 이래저래 마주치기는 한다. 성경 통독을 할 때도 있고, 또 정해진 진도에 따라 말씀 묵상을 한다. 어쨌든 읽다 보면 간간이 감동적인 구절이나 장면을 만나기도 한다. 특히 11장에서 “믿음으로 아벨은…”으로 시작하는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에 관한 감동적인 서사는 우리가 가장 즐겨 읽는 본문 중 하나다. 또 우리의 연약함에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더없이 감동적이며 구약의 제사보다 더 확실한 새 언약의 제사 이야기 역시 은혜롭다. 하지만 히브리서에 관한 우리의 친숙함은 대략 그 정도 수준에서 끝난다. 그런 ‘간헐적인’ 만남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라는 글의 전체 덩어리와는 여전히 어색하다. 어찌 보면 히브리서는 같은 반이지만 한 번도 제대로 말을 걸어 본 적이 없는 친구 같다. 매일 만나니 친숙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막상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는 형편이다. 친구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한, 그런 사이다.

사실 신약에서 가장 난해한 책으로는 요한계시록을 꼽는다. 가장 큰 이유는 묵시문학이라는 장르 때문이다. 이미지와 상징으로 말을 거니, 소위 “문자적인” 수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난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다르다. 분명 명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저자 나름대로 확실하게 신학적 주장을 개진한다. 그런 점에서는 바울이 쓴 여느 편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히브리서는 바울서신들에 비해 훨씬 더 어렵다. 학자들도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가 요한계시록 다음으로 어렵다는 데 동의한다.

히브리서 자체가 원래 어려운 글이라면, 이 글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은 아니다. 물론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지만, 우리가 상대적으로 히브리서에 더 무식한 것은 그 나름으로 불가피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지를 자랑할 순 없다. 히브리서가 부담스러운 이유에 관해 냉정한 분석이 필요하다. 글이 어색한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그만큼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효과적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히브리서를 어렵게 느끼는 것일까? 히브리서에 관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히브리서에 다가가는 길을 닦는 의미에서, 이 특이한 글을 둘러싼 몇몇 특이한 사항들을 짚어보기로 하자.

bible

신약 속의 구약, 히브리서

히브리서가 부담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처음부터 마구 등장하는 구약 인용구 때문일 것이다. 사실 히브리서는 구약을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고 있는 신약 문서다. 초대교회의 (구약) 성경 해석에 관한 중요한 책을 썼던 롱기네커(Richard Longenecker. 아들 Bruce 역시 훌륭한 신약학자다)의 계산에 따르면, 구절 자체 인용이 38회, 인용까지는 아니지만,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이 55회에 이른다. 물론 학자들의 계산 방식에 따라 구체적인 수치는 달라진다. 하지만 구약이 ‘엄청’ 인용되거나 언급된다는 사실 자체는 개역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금방 느껴진다.

가령 1장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상속받았다는 핵심 주장을 제시하며(4절) 시편의 여러 곳과 사무엘하의 일곱 개의 구절을 연거푸 인용한다. 저자 자신의 설명은 거의 없이 “…하셨으며, 또 다시…”(5절), “말씀하시며”(6절), “…하셨으되, 아들에 관하여는” (8절), “…하였고 또 …” (9-10절) 하는 식의 연결구가 나오는 정도다. 말하자면 그냥 구약의 구절들을 짜깁기 하여 자기 논증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저자라기보다는 거의 편집자에 가깝다.

물론 구약 인용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할 이유는 없다. 당시 교회에서는 구약이 유일한 성경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성경 속에 예시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계속 인용하다 보면, 정작 구체적인 논점을 놓칠 가능성도 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서 논증의 많은 부분이 이런 형태의 구약 인용에 의존하고 있다. 성경적 권위를 강조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치밀한 논증의 자리에 계속 삽입되는 구약의 구절들은 종종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한다. 가령 5장에서 저자는 제사장의 영예는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로 앞서 자신이 인용한 바 있는 시편 2편 7절과 110편 4절을 인용한다. 물론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직접 제사장으로 임명- 선포하셨다는 증거로 인용된 것들이다. 하지만 인용된 구절만을 읽고서 그 논점을 곧바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전후 사정을 다 파악하고 나면 이 구절들이 저자의 논증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알 수 있겠지만, 당장에는 불쑥 등장한 구약 구절들이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단순 인용’만 많은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자체가 시종일관 구약과의 대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들보다, 모세보다, 그리고 천사들보다 크다. 광야 이스라엘이 들어가지 못한 안식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간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되는 또 다른 대제사장이시다. 그래서 “골치 아픈” 제사 이야기가 많다. 또 그리스도는 옛 언약과 여러모로 비교되는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 히브리서의 이런 독특한 논증들은 모두 구약의 이야기를 전제한 것들이다. 저자는 새 언약이 한편으로는 옛 언약과 같고, 한편으로는 그와 본질에서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복음에 관한 저자의 핵심 주장을 이해하자면 우선 옛 언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구약의 이야기를 전제하고, 그것과 비교하며 복음을 설명하다 보니, 논증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이 한층 더 어렵게 느껴진다. 드문 경우기는 하지만, 저자가 종종 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칠십인 역(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으로, 초대교회는 대부분 이것을 사용했다)을 사용한다는 사실도 독자인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가령 8장 9절에 인용된 칠십인 역 예레미야 33장 32절과 히브리어를 번역한 우리의 구약성경을 비교해 보라). 더 나아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가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그리고 땅의 것과 하늘의 것 사이의 ‘플라톤주의적’ 대조와 뒤엉킨다는 사실도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

풍성한 성경 인용이 히브리서의 논증을 더욱 깊이 있고 다채로운 것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읽는 우리에게 더 큰 부담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조용한 시간, 차분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성경을 읽고 싶은 우리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히브리서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손에 흙을 묻히고 머리를 쥐어뜯어야 할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피하고 싶은 메시지, 심판

우리가 히브리서를 부담스러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신학적 어려움일 것이다. 구체적 정황은 알기 어렵지만, 히브리서는 분명 배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편지다. 그래서 저자는 “멸망을 향해 뒤로 물러서는”(10:30) 배교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반복하여 지적하며 섬뜩할 정도의 경고를 날린다. 히브리서 저자의 적나라한 어조는 신학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일으킨다. 특히 하나님의 불가항력 은혜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진 장로교 신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가령, 히브리서는 구약 성도들의 경험과 교회의 신자들을 비교하면서, 신약시대의 우리가 “더 큰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입장에서 누리는 구원이 크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책임도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천사들을 통해” 주신 율법의 말씀을 어긴 이들도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 복음은 “주님을 통해” 주신 말씀이고, 목격자들이 전해준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다양한 표적으로 확증해 주신 바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긴다면 어떻게 (그 보응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2:1-4). 같은 논리가 10장에서도 반복된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의 법을 무시한 사람도 두세 증인을 통해 관대한 처분을 받지 못하고 죽어야 했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신을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마땅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습니까?” (10:28-29).

역시 같은 논점이 12장에 다시 나타난다. 과거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일은 백성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12:18-21). 그런데 지금 성도들이 도달한 곳은 만질 수 있는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맏아들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다(12:22-24). 이 비교의 의도는 분명하다. “제발 말씀하신 분에게 반항하지 마십시오. 땅에서 경고하신 이에게 반항한 그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면, 하물며 하늘에서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12:25).

히브리서 저자에게 있어 하나님은 “원수 갚을 권리”를 갖고서 “내가 갚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따라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분”이시다(10:30). 그러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안으로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10:31).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며, 우리 속의 가장 깊은 것까지 드러내며 심판을 수행할 것이다(4:12-13). 그래서 하나님께 나가는 자의 기본적인 태도는 그가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자신을 찾는 자에게 상으로 혹은 형벌로 확실히 “갚아주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11:6). 이는 물론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지만, 왜곡된 은혜의 논리로 말랑말랑해진 복음에 젖은 이들에게는 불편함 그 자체일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물론이고, 설교자들조차 이런 메시지는 피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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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와 회개는 불가능하다?

아마 히브리가 던지는 가장 큰 신학적 난제는 심판 그 자체보다 배교에 관한 적나라한 묘사와 배교하는 자들을 향해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선언하는 부분일 것이다.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그래서 이런 관점을 가장 선명하게 선언하는 6장 4-6절은 히브리서 전체를 걸쳐 가장 ‘악명 높은’ 구절이라 할 수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공공연히 그를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4-6)

이런 식의 선언은 누구에게라도 불편하다. 그래서 많은 주석은 이 구절의 적나라한 경고를 두고 “이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고요”하는 식으로 해석할 때가 많다. 가령 최근의 한 주석가는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용서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격한 사람들 자신이 “그에게 돌아갈 의사가 없어서” 그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회개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는 것이다(Schreiner, 180-81). 필자도 이게 사실이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히브리서의 다른 구절들은 그럴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고의로 죄를 지으면 더 이상 속죄하는 제사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무서워하면서 심판과 반항하는 자를 태워버릴 맹렬한 불을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10:26-27)

회개할 마음이 없다는 것과 속죄할 제사 자체가 남아있지 않는다는 말은 다르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새 언약의 제사는 약효가 확실하지만, 일회용이다. 회개할 의도가 있어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심판을 경고하며 대표적 반면교사로 언급된 창세기의 ‘에서’  이야기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음식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넘겼다.

“그 후 축복을 상속받고 싶었지만 자격을 상실했고, 눈물을 흘리며 복을 달라 간청했지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12:17)

그러니까 의도적인 배교 후 새로운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과 그 구원을 위한 속량 행위 자체의 본질과 관련된다. 우리는 “시간이 지났다”고 모호하게 말하고 싶지만(Schreiner, 393), 히브리서는 그가 (하나님에 의해) “실격했다”고, 혹은 “버림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cf. 고후 13:5-6).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히브리서 저자가 거듭하여 강조하는 사실이다(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그렇다. 히브리서가 부담스러운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구약을 동원한 논증 방식도 어렵고, 심판과 배교에 대한 경고도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필요는 없다. 어려운 만큼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가 있고, 실제 이 기대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복잡해도 차분하게 접근하면 될 것이고, 필요한 만큼 시간을 들이면 된다. 뛰어가는 코스가 있다면, 엎어져 기어가는 곳도 있지 않겠는가! 결코 쉽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꼭 오르고 싶었던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우리의 여정을 시작해 보자.


권연경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풀러 신학교(M.Div.)와 예일 대학교 신학부(S.T.M.)를 거쳐 런던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이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바른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로마서 산책』(복 있는 사람), 『행위 없는 구원』『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SFC),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선교회)가 있고, 『IVP 성경신학사전』『예수의 정치학』(IVP, 공역), 『기독교와 문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