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와 ‘밀정’

역사학도 강성호의 무기는 '자료'다. 다양한 자료를 근거로 성역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한국교회와 사회의 역사적 흑역사와 민낯을 들추는 그의 글을 기대하시라!

일제의 정보망으로 활동한 밀정(密偵)은 경찰과 더불어 조선인들에게 가장 악명이 높았던 사람들이었다. 밀정은 독립운동단체의 분열을 조장하고 기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식민 지배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독립운동단체들은 밀정의 처단을 중요한 활동 목표로 삼기도 했다. 상해임시정부는 ‘칠가살(七可殺)’이라고 하는 처단대상을 선언한 적이 있는데, 그중 밀정은 “독립운동의 비밀을 밀고하거나 동포에게 위해를 주는 추류(醜類)”로 분류되었다. 영화<암살>과 <밀정>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의열단도 밀정 암살에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 선교사들의 보고나 편지에서도 종종 밀정이 언급될 정도였다.1) 일제의 밀정은 1908년 6월 조선인 헌병보조원 제도가 창설되면서 시작되었다.2)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밀정 활동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여 의병에 동조하거나 숨겨준 마을을 불태우는 등 의병토벌작전에 참여했다. 1909년 대토벌작전 때도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일본 헌병의 밀정 역할을 했다.

일종의 스파이(Spy)라 할 수 있는 밀정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월급이나 상여금을 받으면서 지속해서 활동하는 ‘고용 밀정’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경찰, 헌병대, 특무기관 등에 고용된 ‘기관 밀정’과 순사나 헌병 등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개인 밀정’으로 세분할 수 있다. 둘째는 특정 사건의 정보를 위해서 필요한 기간만큼 임시로 활동하는 ‘촉탁 밀정’이다. 셋째는 준(準)밀정이라 할 수 있는 ‘밀고자’다. 이들은 이해관계나 원한 때문에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특징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순사와 헌병이 밀정 활동을 하는 ‘정탐’이 있다.3) 이 중에서 고용밀정과 촉탁밀정이 중심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을듯하다.

밀정

영화 <밀정> 포스터

‘밀정’ 김길창 목사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와 밀정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까. 언뜻 보면 이 두 가지는 서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밀정은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와도 관계가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식민지 조선의 교회에서 밀고가 나오기에 적합한 문제였다. 설교 시간에 반일 내용이나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내용을 설교하는 목사를 밀고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는 부산 항서교회의 김길창 목사다. 그는 해방 후 4개의 학교재단을 비롯하여 동아대와 부산신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왕성한 교육 사업을 펼친 교역자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1949년 반민특위가 활동할 때에 피의자로 검거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반민특위의 과거사 청산 시도가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무고함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반민특위는 그에게 네 가지 혐의가 있다고 보고 입증하려 했다. 반민특위는 그가 신사참배를 솔선 실천했으며, 황국신민화 운동과 기독교계의 내선일체 운동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 및 남녀 신도 등을 일경에 밀고”했다고 보았다.4) 이를 입증하기 위해 1949년 3월 25일에 진행된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김길창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결사적으로 반대한 한상동 목사를 경찰에 밀고”한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5)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감옥에 갔던 출옥 성도로서 고신 교단의 초기 지도자이기도 했다.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도 4월 13일의 신문과정에서 밀고 여부를 물었다. 그는 이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근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김길창 목사의 밀고 여부를 알 만한 사람들의 증언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반민특위는 7명의 증언자를 모았고, 이들의 증언 내용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겼다.

표1

<표1> 김길창 목사의 밀고여부와 관련된 증언자들

<표1>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반민특위가 김길창 목사를 체포하기 전부터 그의 친일협력 여부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길창 목사가 반민특위에 체포된 날짜는 1949년 3월 14일이었다.6)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의 친일협력 여부를 알기 위해 김금순, 한익동, 김만일을 조사한 지 20여 일이 지난 시기였다. 김금순은 김길창 목사가 경남지역 교회의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경찰과 결탁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밀고했으니 그가 반민법으로 처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김길창 목사와 함께 경남지역에서 사역을 했던 한익동 목사도 그가 고등계 형사들과 빈번하게 만났으며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의 구금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증언했다. 김만일 목사는 김길창 목사가 고등계 형사 가운데 박문기와 친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도 했다. 참고로 박문기는 2008년에 발표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친일경찰이었다. 사전에 실린 기록에 의하면, 박문기는 1931년 경상남도 순사에 임용된 이후 주로 부산지역의 고등계 형사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김길창 목사와 박문기가 부산・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이 둘의 친분이 쉽게 형성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김길창 목사가 체포된 이후 진행된 증인 신문에서 밝혀진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다. 김상순 목사는 1942년쯤에 신사참배 문제로 항서교회에서 비밀회의가 진행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토론이 격렬하게 진행된 후 이를 반대한 이들은 일제 경찰에 호출을 당했다고 한다. 김상순 목사는 명확한 증거가 없지만, 김길창 목사의 밀고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았다. 박인순 전도사는 자신이 신사참배에 반대했다가 경찰에 구속당한 적이 있는데, 석방 후 김길창 목사가 밀고했다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01. 구속영장(김길창)

반민특위가 발행한 구속영장. 오른쪽 상단부에 김길창(金吉昌)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흥미로운 증언은 장세권과 윤인구에게서 나왔다. 장세권은 식민지 부산경찰서의 고등계 형사로 근무했던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지금까지의 다른 증언자들이 대부분 목사였다는 점과 달리 장세권의 증언은 밀정의 배후세력인 일제 경찰의 상황을 반영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1938년에 자신의 처가 항서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김길창 목사를 알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장세권은 그 당시에 일본인 경찰 2명과 함께 항서교회에 입회하여 김길창 목사가 궁성요배, 황국신민서가 낭독 등을 진행하고 설교 시간에 신사참배를 시행하자고 주장했던 것을 증언했다. 주목할 점은 김길창 목사가 거물이기 때문에 경찰서에서도 소위 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했다는 내용이다. 장세권에 의하면, 김길창 목사는 경남도 고등계 주임인 하라다(原田)와 부산서 고등계 주임인 아라이(荒井)와 긴밀했을 뿐만 아니라 하판락, 강락중과도 친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하판락과 강락중은 대표적인 친일경찰). 그는 김길창 목사의 밀고 내용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그의 밀고를 인정했다.   

반면, 윤인구의 증언은 김길창 목사의 무혐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는 부산대학교, 부산사범학교, 조선신학원을 설립한 교육행정가였다.7) 그는 김길창 목사가 교회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친일협력을 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친일목사의 유형을 3가지로 구분한 뒤 김길창 목사는 일시적인 실수를 저지른 3부류로 분류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을 밀고한 1부류와 친일단체의 간부를 맡은 2부류와 달리 일제의 술책에 이용당한 부류로 분류함으로써 그의 친일혐의를 덮으려고 했다.

00. 김길창 목사

김길창 목사는 부산․경남지역의 대표적인 친일 목사라 할 수 있다. 왼쪽의 사진은 1937년 8월 5일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비 넥타이를 맨 인물이 김길창 목사이다. 오른쪽의 사진은 자서전을 발간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출처: 김길창, 『말씀 따라 한평생』, 경성대학교 출판부, 1972)

이상 우리는 반민특위의 증언 자료를 통해 김길창 목사가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정황을 살펴보았다. 이 외에도 김길창 목사가 밀정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가 있다. 1940년 10월 29일 자로 찰스 어드만(Charles Eerdmans)이 제임스 후퍼 목사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이다. 찰스 어드만은 1925년에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의 총회장으로 선출된 자로 그 당시 미국의 보수신학을 대표하던 메이첸과 대립한 적이 있었다.8) 그의 편지에 의하면, 김길창 목사는 성서 연구소를 위한 기금을 마련한다는 표면상의 목적을 가지고 뉴욕을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밀사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한 미국교회의 태도를 바꾸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9) 이 편지 내용을 둘러싼 정황을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으나 미국인이 보기에도 김길창 목사는 일제의 정보정치와 긴밀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과 오현주의 ‘밀고’

그러나 김길창 목사는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로 반민족 행위자를 규정하는 반민법 제4조 4항으로 조사를 받지 않았다. 반민특위의 활동 근거가 된 반민법은 반민족 행위자의 범주를 ‘당연범’과 ‘선택범’으로 나누었는데, 밀정의 경우 당연범의 범주에 들어갔다. 여기서 당연범이란, 행위와 상관없이 무조건 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되어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김길창 목사의 밀고 여부는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지만, 그는 당연범이 되는 건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밀정 행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되거나 조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모두 44명이라고 한다.10) 이 가운데 기독교와 관련된 이는 무려 10명이다. 우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과 관련된 강낙원과 오현주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표2

<표2> 반민특위에 밀정으로 체포되거나 조사를 받은 기독교인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다. 이 여성독립운동단체는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던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통합되어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통합 후 임명된 주요 임원으로는 오현관 총재와 오현주 회장을 들 수 있다. 이 둘은 해주 오씨의 가문에서 태어난 자매였다. 주목할 점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정신여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미션스쿨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개화기의 신식교육을 받은 기독교인 여성들이 만든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3・1운동으로 감옥에 갔다가 풀려난 김마리아의 등장으로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겸 총무 황에스더, 서기 신의경 등으로 새로운 임원이 선출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마리아 체제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적십자부과 결사대를 신설하여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표방했다. 1919년 11월 1일에는 군자금 2천 원을 송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한민국애부인회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 일제 경찰의 검거 선풍을 맞아야 했다. 회장 김마리아를 비롯하여 간부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바로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김마리아와 황애덕은 심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간부들은 적게는 1년, 많게는 3년이라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활동은 겨우 두 달도 되지 않아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문제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정체가 들통 난 이유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초대 회장을 역임한 오현주의 밀고로 일제 경찰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오현주는 1949년 3월 16일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반민특위의 자료에 의하면, 오현주는 서울 안동교회에 다니고 있던 교인으로서 8년 전(1941)에 교회 집사로 임명된 적이 있다고 한다.11) 이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은 오현주의 남편인 강낙원이다. 1949년 4월에 간행된 <반민자 죄상기>(고원섭 편, 백엽문화사)에 의하면, 강낙원은 21살에 북경으로 건너간 후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다. 1927년에는 일본에서 근대화된 체육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서울의 고등보통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씨름협회를 창설했고, 1934년 1월에는 전조선무덕관권투부의 대표로 전조선아마츄어권투연맹의 창설에 참여했다. 1938년에는 황국신민체조의 보급에 적극 기여했다. 오현주의 증언에 의하면, 강낙원은 반민특위에 검거되기 전까지 대한청년단의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해방정국에서 강낙원은 우익청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지 않을까 싶다. 이 둘은 이상재의 중매로 1916년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강낙원은 상해에서 돌아온 후 오현주에게 임시정부가 지방색으로 인해 분열이 심하니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활동을 더는 하지 말라는 여러 번 권유를 했다고 한다. 10여 일 후에는 자신의 검도와 유도선생이라고 소개한 유근수를 데리고 왔다고 한다. 반민족 행위자로 조사를 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오현주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드나, 그녀는 강낙원과 유근수가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관해 계속해서 물어보았지만, 이틀 동안 거절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유근수를 살펴보니 별 의심이 가지 않아서 3일째 되는 날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현주는 유근수를 남편의 스승으로 알았을 뿐 고등계 형사인 줄 전혀 몰랐다고 변명했다. 이유야 어쨌든 대구의 고등계 형사인 유근수는 오현주의 밀고 내용을 가지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오현주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반민특위는 3명의 증언을 확보했다(신의경, 장선희, 이혜경). 이 3명의 증인은 당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간부를 역임했던 사람들로서 모두 연동교회와 연관이 있었다. 오현주와 정신여학교 동창이었던 신의경은 1923년 연동교회의 집사, 1957년 권사로 임명된 기독교인이었다.12) 신의경은 대구경찰서로 잡혀간 후 김영균 변호사로부터 강낙원과 오현주가 고등계 형사 유근수에게 밀고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출옥 이후 30년간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하니 오현주에 대한 신의경의 분노가 어땠을지 대략 짐작이 간다.

오현주의 밀고 여부는 다른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현주와 정신여학교 동창으로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서 재무원으로 활동한 장선희도 변호사와의 면회 등을 통해 오현주의 밀고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그 당시 판사가 밀고한 사람이 사례금으로 거금 3천 엔을 받았다는 진술이다. 이런 내용은 다른 증언자인 이혜경에게서도 나온다. 이혜경은 예심 도중 판사가 오현주의 말과 상반된다고 추궁을 받은 일이 있으며, 출옥 이후 밀고한 자들이 돈을 많이 받아서 좋은 집을 사서 서대문 밖으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02. 오현주 기고글

해방 후 오현주는 서울안동교회의 권사로 조용히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교회 밖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1978년에 외솔회가 발간하는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서 김마리아와의 일화를 짧게 소개하는 글을 썼던 걸 확인할 수 있다.

03. 오현주(안동교회 권사)

오현주는 1941년부터 서울안동교회의 집사로 임명된 걸로 보인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안동교회 90년사》를 보면, 그녀가 1960년쯤에는 교회 권사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진의 맨 오른쪽에 보이는 16번이 오현주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밀고’한 기독교인들

이 밖에도 식민지 조선의 교회에서 이루어진 밀고 사례들은 적지 않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안식교(재림교회)의 최태현 목사 사건이다. 그는 삼육대학교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삼육학원을 설립한 자로 식민지 시기의 안식교에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었다. 그런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는데, 강진하, 고희경, 김온준, 이여식, 정모 등 안식교도 5명은 최태현 목사의 행방을 일제 경찰에게 밀고하여 옥사하게 했다. 이러한 연유로 이들은 1949년 8월 20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13) 최태현 목사는 이들의 밀고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일제 경찰들에게 체포된 후 사망하여 안식교의 ‘순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김동만(金東滿)은 목포 양동교회의 집사로 박연세 목사의 설교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 일제에 밀고한 자이다. 박연세 목사는 3․1운동 당시 군산의 영명학교 교사와 구암교회 장로로서 이 지역의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2년 6개월동안 징역을 살았다.14) 이후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26년부터 1940년까지 목포 양동교회에서 시무했다. 참고로 이 교회는 전남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예배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일제가 볼 때 1942년 7-8월 사이에 이루어진 박연세 목사의 설교 및 발언 내용은 문제가 있었다. 중일전쟁 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박연세 목사는 “일본은 새로이 미・영을 상대로 하는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고 독일도 소련과 교전 중인데 이것들은 모두 약육강식의 전쟁이다”라고 하여 대동아전쟁의 숭고한 목적을 비방했고, “국어(일본어) 상용은 국가의 방침에 불과하므로 교회 안에서는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거나 “육체적으로는 천황폐하를 제일 존경해야 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해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통해 불경을 저질렀다는 이유에서다.15)

04. 김동만 기사(1949.6.21.경향)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있는 김동만 집사에 대한 기사. 본인은 이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한다. (출처: 1949년 6월 21일자 경향신문)

사진의 판결문에서 주목할 점은 일본어 사용 문제와 관련한 박연세 목사의 진술이다. 여기에서 박연세 목사는 자신이 일본어 사용을 반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교회 내부의 알력싸움에서 반대파 세력은 자신이 일본어를 사용할 수 없는 걸 알자 목사 사퇴를 권했다고 한다. 박연세 목사는 여기에 대한 반발로 일본어 사용을 교회에서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면피용 진술일 수 있겠으나 교회 분규 맥락에서 밀고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어쨌든 박연세 목사는 1942년 11월 9일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항소하여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지만, 복역 도중 옥중에서 사망했다.

밀정2

영화 <밀정>

 ‘밀정’은 우리의 흑역사다

밀정 행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된 44명의 인물 가운데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경우는 21명이다.16) 여기에는 강낙원, 강진하, 고희경, 김동만, 김온준, 이여식, 정모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현주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아마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에서 남편(강낙원)의 지분이 더 컸다고 여긴 결과가 아닐까 한다. 재판이 진행되던 중 발발된 한국전쟁으로 과거사 청산은 미완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밀정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강낙원, 강진하, 김동만, 김온준, 김창집, 박재홍, 배정자, 변설호, 오청, 이여식, 이종형, 이준성, 장우형, 정모, 정치곤, 차기범에 대한 재판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암살>과 <밀정>을 통해 식민권력의 정보정치에서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밀정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보통 밀정이라 함은 배정자 등을 쉽게 떠오르게 된다. 즉, 지금까지 밀정은 식민지 조선의 교회와 무관한 문제로 치부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살펴본 것처럼, 밀정은 식민지 조선의 교회에서도 적지 않게 나타난 문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부산・경남지역에서 활동한 김길창 목사가 고용밀정으로 추정된다면, 안식교의 최태현 목사 사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 박연세 목사 사건 등은 특정한 이해관계나 원한으로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밀고한 것이다. 본 글은 식민지 조선의 교회와 밀정의 문제를 시론적(始論的)으로 다룬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이어져서 식민지 시기의 한국교회사에 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지면 좋겠다. 미완의 과거사 청산을 넘기 위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의 흑역사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주-

  1.  1919년 3월 15일자로 John F. Yeuso가 A. J .Brown에게 보낸 편지를 예로 들 수 있다.
  2.  임종국,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 150쪽.
  3.  임종국, 『실록 친일파』, 145쪽.
  4. 「반민특위 피의자(김길창) 신문기록」(김승태,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다산글방, 1994, 453쪽)
  5. 「반민특위 피의자(김길창) 신문기록」(김승태,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462-463쪽)
  6. 「親日牧師金吉昌, 道特委서어제逮捕收監」, 『민주중보』1949년 3월 15일자.
  7.  이병원, 「윤인구의 생애와 교육사상 연구」, 『로고스경영연구』Vol.12 No.4, 2014.
  8.  찰스 어드만의 동생인 윌리엄 어드만(W. C. Eerdmans)은 평양신학교의 교수로서 《신학지남》을 통해 한국장로교회에 보수 신학을 심어주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그는 성서의 무오성을 과학, 역사, 연대기, 고고학 등을 통해 입증하는 글을 쓰는데 주력했다. (박용규, 『한국장로교사상사』, 총신대학출판부, 1992, 95-97쪽)
  9.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ⅩⅣ, 256쪽.
  10.  허정,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선인, 2003, 264쪽.
  11. 「반민특위 피의자(오현주) 신문기록
  12. 『연동교회 100년사』, 821쪽, 837쪽.
  13. 「교인밀고자 李․金 등 수감」, 『경향신문』1949년 8월 24일자.
  14.  김승태,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증언』, 다산글방, 1993, 396쪽.
  15.  박연세 목사 광주지밥법원 목포지청 판결문」, 『신사참배문제 자료집』Ⅲ,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528-531쪽.
  16.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65쪽.

강성호
강성호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석사과정으로 한국현대사를 공부했다. 현대 한국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학도. 졸업 이후 전남 순천으로 삶의 터를 옮겨 2년 차 전라도민이 되었다. 가나안 성도로 산지도 2년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