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책] ‘행복한 페미니즘’ – 당신의 페미니즘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글로 배운 페미니즘] (1) 행복한 페미니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은데 막막하신가요? 그런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당신을 페미니즘의 세게로 인도할 책을 선별하여 소개합니다. 주로 고전과 종교와 연관된 책을 다룹니다. 

페미니즘을 비판한 페미니즘

최근 몇 년간 인기를 누리고 있는 TED 강연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인기가 있었던 강연은, 페이스북 CEO 쉐릴 샌드버그의 강연이었다. [동영상 보기]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고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그 강연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나도 쉐릴 샌드버그의 고충에 깊이 공감했다.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데에 익숙해진 여성들, 돌봄노동을 하느라 직장에서의 성취를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여성들, ‘뒤로 물러서’ 버리는 여성들에게 쉐릴 샌드버그는 “앞으로 나가서, 쟁취하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녀의 노력이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여, 야망을 가지세요, 물러서지 마세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분명 우리 여성들은 이런 종류의 메시지에도 익숙하게 노출되어 본 적은 없다. 쉐릴 샌드버그는 여성들이 ‘작은 야망을 가지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컴퓨터로 일을 하라고, 더 많은 성과를 쟁취하라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모든 여성이 자기 자리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강력하게 노력을 하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일까?

벨 훅스는 <행복한 페미니즘>에서 그 문제에 관해 전면적으로 고개를 흔들고 나선다.

만약 ‘파워’라는 말이 타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통하여 얻어지는 파워를 의미하는 것일 때 파워 페미니즘 따위의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7)

벨 훅스는 ‘초기 페미니즘’의 흘러간 조류를 비판하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초기 페미니즘’은 무슨 빅토리아시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존 스튜어트 밀의 페미니즘은 아니다. 처음으로 미국사회에 ‘주된 이데올로기’로 페미니즘이 떠올랐던 시절, 공민권 운동의 궤적을 따라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일어났던 급진 페미니즘 운동을 벨 훅스는 ‘초기 페미니즘’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이 책은 2000년에 출간되었다(한국에 번역된 것은 2002년이다).

모든 초기의 것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의지와 희망은 맨땅에 머리를 박으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에너지는 강한 전파력을 가진다. 강한 전파력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은 때로는 아주 뒤틀린 방식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이 처음 한국에 출간되었을 때는 대중적 페미니즘 입문서로 소개되었다. 지금 다시 읽어 본 이 책은 “어떻게 해야 페미니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한 페미니즘 운동론이다. 대중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페미니즘 내부를 향한 벨 훅스의 비판은 무척 날카롭다.

‘라이프 스타일 페미니즘’은 무엇을 놓치고 있나?

벨 훅스는 수많은 사람이 손쉽게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는 것에 관해 우려를 표한다. 이런 우려는 페미니스트가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그러느냐, 그저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 반대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냐, 같은 비판에 직면하게 되곤 하는데 벨 훅스의 우려는 그런 엘리트주의적 차원의 논의는 아니다. “정치적 신념이야 어떻든 누구라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조류를 ‘정치적 운동과 실천’으로서 존재하는 페미니즘과 구분 지어 ‘라이프 스타일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한다.

‘라이프 스타일 페미니즘’은 일관되게 여성을 피해자로 설정한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면서 수많은 여성이 자신을 (남성에 의해 가해 당했으며, 남성을 공격함으로써 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피해자’의 위치에 놓는다. 물론 세상에서 지금껏 여성으로서 겪어온 고통에 대한 울분과 적의를 풀어놓는 장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여성들은 고통을 털어놓으면서 치유받기도 하고, 맞서 싸울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곳에서 ‘머물러버린’ 페미니즘을 경계한다. 이 구도에서 남성은 ‘지배자’로 명명되고, 여성은 페미니스트로서 자기 내부의 성차별주의를 돌아보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이 ‘페미니스트’들의 성차별주의가 여성들 내부의 자매애를 해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벨 훅스가 지적하는 ‘자매애를 해치는 행위’들은 다양하다.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는 ‘빛나는 여성들’ 뒤에서 여전히 수많은 폭력적 상황에 노출되는 하층계급 여성들을 주목하지 않는 것,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들기를 원하는 남성들을 거부하고 단죄하며 ‘반남성주의’로 나아가는 것, 이 두 가지를 결합하게 하는 것의 중심에 오로지 성별 적대에 기반을 둔 ‘여성의 피해자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책은 반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남성 운동들이 이 ‘라이프 스타일 페미니즘’ 그룹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사회 구조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울분과 상처를 푸는 굿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언어로 말하면 현상이 현상을 ‘미러링’하는 격이다.

페미니즘의 고전 <제2의 성>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심지어 ‘여성’이라는 젠더마저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은 더욱 명확하다.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스스로 선택하고, 페미니스트로서 행동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반성차별주의자’를 모두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하는 형태로 주체가 상실된 명명은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을 흐트러뜨린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건과욕망

페미니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흔히 페미니즘을 자신의 서사로부터 받아들인다. 여성들의 경우 그런 경향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나 자신이 여성이고, 그러므로 페미니즘 자체가 나를 해방시키기 위한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페미니즘을 학습하고 있다고. 이것은 반만 옳다. 새롭게 페미니즘에 유입되는 페미니스트들이 “저절로 페미니즘을 획득할 수 없으니, 나이든 페미니스트들은 교육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벨 훅스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회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는 생각만큼 그렇게 허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반성차별주의자, 심지어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지만 페미니스트를 선언한다고 자연스럽게 반성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자행되거나 간과되는 억압과 착취가 여성들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자매애를 해치는 상황은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다양하다. 최근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경우는 성소수자인 남성을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똥꼬충’ 같은 혐오적 표현을 쏟아내면서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런 종류의 억압들이 결국에는 성소수자인 여성들에게 고스란히 쏟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소수자인 여성들은 지금도 남성들에 비해 제대로 가시화조차 되지 않는다. 성소수자인 남성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운동의 방향을 이끌고 나간다면, 그 남성들과 함께 여성인 성소수자들의 발아래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아니, 더 빨리 무너질 것이 자명하다. 바로 우리 앞에 ‘성차별’이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빈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빈곤한 남성의 성차별주의가 그의 빈곤에서 비롯했다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한다. ‘연봉이 그 정도뿐이어서 그러시나’, ‘그거 사 먹을 돈도 없어서 어쩐대요’. 이 언어들은 남성 일반보다 훨씬 폭넓게 세상에 존재하는 빈곤한 여성을 지워 버린다. 대부분의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빈민화를 겪는 것은 여성들이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적고, 여성에게는 경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장 저임금이야 말로 여성들의 몫으로 주어진다. 이 문제에 대해서 벨 훅스는 진지하게 천착한다. 바로 페미니즘의 대중적 폭발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의 열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처한 경제적 곤궁을 직시하고 문제화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의 정강으로서 대중적 반응을 폭발시킬 것이다. 그것은 분명 대중조직화의 장이자 공통의 이해로서 모든 여성들을 결합시키는 이슈가 될 것이다. (125)

이 문제를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남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반남성주의자’라고 지칭한 페미니스트들을 “모든 여성을 희생자로 재현하기 위하여 모든 남성을 적으로 명명했다”과 비판한다. 가부장적 세계 속에 있다고 해도 ‘모든 여성’이 ‘모든 남성’에 대한 희생자가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런 형태로는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들의 삶을 설명해 낼 수도 없다. 벨 훅스는 (때로는 그것이 부정적일지라도) 남성과 여성을 묶고 있는 경제적 정서적 결속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런 착취와 억압을 페미니즘 내부에서 몰아내기 전까지 진정한 자매애는 실현되지 않는다고 호소하며 벨 훅스는 “외부의 적을 소탕하려면 내부의 적부터 소탕해야 한다”, “여성들이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변혁하지 않은 채 페미니스트 정치학의 깃발을 치켜든다면 페미니즘의 대의는 궁극적으로 훼손되고 말 것이다”라는 경고까지 서슴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성차별주의를 재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일차적으로 몰아내야 할 “내부의 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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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FEMINISM IS FOR EVERYBODY>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고 그녀가 강력하게 믿는 이유는, 바로 페미니즘이 모두를 당사자로 둔, 모두에게 이로운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투쟁에서 남성을 동맹군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전진할 수 없다”, “모든 연령대의 남성은 성차별주의에 대한 저항이 긍정되고 가치를 인정받는 모임을 필요로 한다”

미국의 경우 ‘남성성’을 주목하려는 시도나 ‘남성 해방 운동’이 발현된 것은 반페미니즘 운동으로 발현된 모양이다. 반페미니즘 운동으로 출발하게 된 점에 관해 이 책은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고수한다. 남성들이 이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억압받고 있는지를 주목하면서, 여성들이 당했던 성차별적 착취와 억압에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등장한 성재기 씨가 대표한 ‘남성연대’ 및 ‘양성평등연대’ 등의 태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벨 훅스의 훌륭한 점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 ‘남성 해방’을 부르짖는 소모임 운동이 가지는 한계가 분명하지만, 그와 별개로 남성들 자신이 자신의 목소리로 ‘남성성’을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충분히 고무되어야 하고, 지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을 투쟁의 동료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결코 매스미디어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는 서술에서는 이 혁명적인 페미니즘 운동을 세상이 ‘좌초시켰다’는 울분까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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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페미니즘은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책은 2000년에 출간되었다. 이제 16년이 지났다. 이 책의 지적을 넘어서서 사회는 한 걸음 진일보한 부분들도 많다. 우리는 ‘페미니즘적 비평’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페미니즘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대상’도 다양하게 발전했다. 더 이상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지평 아래에 갇혀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문제를 제기한 지점들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우리는 정말 우리 내부의 성차별주의와 맞서 싸우고 있을까? 그 맥락에서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자칭하거나, 타자에게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하고 있을까?

벨 훅스는 젠더가 우리의 위치를 결정짓는 유일하고도 확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양한 억압에 노출되어 있고, 서로 다른 계급과 인종과 젠더 속에서 비스듬히 서 있다. 진짜로 페미니즘이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되려면, 누구와 함께 무엇을 타격해야 할지 분명하게 결정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이롭다”는 나이브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오산이다. 읽을 때마다 당신의 페미니즘이 어디에 서 있는지, 이 사회의 운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 책은 날카롭게 벼려서 끝없이 물어댈 것이다. 무엇보다도 “억압받는” 사람들과 당신이 “정직하게” 함께 하고 있는지를.


이서영
이서영

앉으면 졸리고, 걸어가면 넘어지고, 먹으면 흘리고, 들고가면 쏟는다. 직장을 다니며 소설도 쓰고 칼럼도 쓴다. 저서로 단편집 '악어의 맛'과 '공동작품집 '이웃집 슈퍼 히어로'와 '일 못 하는 사람 유니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