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책] ‘이갈리아의 딸들’ –  강요된 ‘우리의 자리’를 지키지 않기 위해

[글로 배운 페미니즘] (3) 이갈리아의 딸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은데 막막하신가요? 그런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당신을 페미니즘의 세게로 인도할 책을 선별하여 소개합니다. 주로 고전과 종교와 연관된 책을 다룹니다. 

한국사회 속의 ‘이갈리아의 딸들’

2016년에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메갈리아’라는 말을 모르기가 어렵다. 2015년 5월, 한국에서 메르스(MERS)가 유행하면서 인터넷에 생긴 여성주의의 새로운 흐름이다. 이 여성들은 인터넷 커뮤니티 DC 인사이드의 한 갤러리에서 지금까지 자신들을 억압해온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향한 ‘미러링’을 시도했다.

“결혼할 남자는 동정이었으면 하는 것이, 솔찍헌 여우의 마음입니다.” 남성들의 외모를 분절해 평가하고, 성기 크기를 평가하고, (남성들의) 순결을 강요하고, ‘김치남’, ‘씹치남’이라는 혐오의 언어를 붙이며 ‘갓양남’과 비교했다. 억압당해왔던 여성들은 자신을 공격자의 위치로, 상대방을 억압자의 위치로 뒤바꿔 놓는 언어실험을 하며 환호했다. 사람들은 메르스 갤러리를 빠져나오며 새로 생긴 이 흐름에 ‘메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메르스 갤러리+이갈리아. 바로 이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 속에 나오는 나라의 이름이다.

노르웨이의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 소설은 1977년에 출간되었다. 출간되자마자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동시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왔다. 이 여성작가는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식으로 견고하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꼼꼼하게 드러냈다. 단, 남성과 여성의 성별을 바꿔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는 남성과 여성이 뒤바뀐 사회의 인식을 현격히 드러내기 위해서 여성(Woman)을 중심으로 움(wom), 맨움(manwom) 같은 단어들을 만들었지만, 한글로는 그 차이가 잘 다가오지 않아서 이 글에서 나는 그냥 여성과 남성으로 지칭하기로 하겠다.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바뀐 세상은 어떤 풍경일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갈리아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착용하는 브래지어 대신 성기를 감싸게 되어 있는 ‘페호(peho)’라는 것을 착용한다. 그들은 분명한 미의 기준에 맞춰서 살을 찌우고, 키를 작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작은 성기를 가진 남성들을 부러워한다. 매력적인 남성과 매력적이지 않은 남성 사이에는 현격한 차별이 뒤따르고,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연기하며 살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아니, 그런 것이 ‘남성의 행복’이라고 일컬어진다.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을 뒤집어서 성차별을 보여준 이 소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에 ‘사고실험’의 SF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SF는 전통적으로 많은 여성 소설가들이 활동했던 장르임과 동시에, ‘페미니즘 SF’라는 하나의 계열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여성 문제를 사고해 온 역사가 깊다. 현재 살아가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더 뚜렷하게 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남성이 임신하는 사회, 생물학적 성별 구분이 제거된 사회, 모든 여성을 노예화하는 사회 등 다양한 페미니즘적 상상력 속에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상상력은 아주 단순하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는 모두 그대로 둔 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성이 세계사적으로 패배”한 상황을 그려냈다.

소설은 청소년기의 주인공 페트로니우스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페트로니우스는 이제 막 페호를 찰 정도의 나이, 중학교 1학년 정도다. 또래들은 이제 모두 다 페호를 차지만, 페트로니우스는 아직 페호를 차지 않는다. 성장기가 늦은 이유도 있고, 페호가 상징하는 억압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뱃사람이 되고 싶다는 페트로니우스의 여동생은 ‘남자는 뱃사람이 될 수 없다’며 페트로니우스를 놀리고, 페트로니우스는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에게 강요되는 것은 ‘사이좋게 지내라’, ‘분노하지 말라’는 아빠의 상냥한 주문이다. 사실 나는 이 문단을 쓰는 중에도 아빠 자리에 엄마라고 실수로 입력했다. 물론 쓰자마자 바로 고치긴 했지만. 앞치마를 입고 커피를 들고 나오며 “얘들아, 사이좋게 지내렴”을 외치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아빠가 아니라 엄마의 몫이기 때문이다. 페트로니우스의 아버지는 곱슬곱슬하게 수염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수염에 컬을 달고 다니는 남자인데도, 나는 이렇게 그의 성별을 깜빡하고 말았다. 성역할에 관한 우리의 인지라는 건 이렇게도 무의식적이다.

이 소설 속에는 때로는 약간 민망할 정도로 현실에 관한 적나라한 유비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뒤집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게 세련된 방식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강력한 충격이 따라온다. 이 소설에는 주된 인물로서 모든 여성의 웃음거리가 되고, 언제나 ‘매스큘리니스트(masculinist・이 세계의 페미니스트)라는 의심을 받는 매력 없는 노총각 올모스가 등장한다. 노총각이라는 것, 결혼은 못 하고 아이는 낳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사회에서 요구되는 미남에 걸맞지 않은 외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올모스를 불행하게 만든다. 남성에게 정해진 일정한 규준에 맞추지 못하면 배제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이 남성은 남성해방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페미니스트들처럼.

매스큘리니스트, 그러니까 남성해방주의자들은 남성들끼리의 공동체를 처음으로 구성한다. 지금껏 여성들에게만 제공되었던 원예 같은 일들을 스스로 해 보면서, 남성들은 자신들이 여성들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배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남성해방주의자로 성장하던 와중에 페트로니우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맑시스트 노동자 여성인 발드리안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이갈리아의 아들들’이라는 소설을 완성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남성과 여성을 이 소설에 쓰인 대로 명확하게 썼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헛갈린다면 아까 내가 그랬듯이 당신의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메갈리아’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mirror

‘페트로니우스’가 처한 현실에 공명할 수 있는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나는 이 책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닿았다. 페트로니우스의 연인인 발드리안은 ‘맑시스트(소설에서는 스파크주의(sparksism)으로 불린다)’이며, 노동자 권력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페트로니우스에게는 폭력을 가한다. 소설 속에는 어떤 가난한 맑시스트 청년이 가하는 성차별적 행동의 전형이 재현되어 있다. 그러나 소설의 어디에서도 발드리안 정도의 가난한 상황에 처해 있는, 혹은 그렇게까지 가난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착취의 상황에 처해있는 노동자/빈민 계급의 남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가난한 상황으로 그려지는 올모스조차도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과 집안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억압받는 가난한 인간이란 어느 만큼 인지의 바깥에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행복한 페미니즘>에서 벨 훅스가 “제발 가시권에 넣어달라”고 애타게 외치던 바로 그 여성들 말이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문학성은 무척 뛰어나다. 노골적인 비유를 사용하면서도 문학적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문학적인 이유는 읽어보면 자명하다. 이 소설은 뒤바뀐 위치에 있는 페트로니우스를 비웃기 위해 쓰인 소설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페트로니우스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다. 페트로니우스의 아버지인 루스는 뱃사람, 잠수부가 되고 싶다는 페트로니우스의 열망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페트로니우스를 위해서 남성을 위한 잠수복을 따로 주문하고, 페트로니우스는 그 잠수복 앞에서 크게 절망한다. 잠수복에는 남성억압의 상징인 페호가 그대로 달려 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꿈꾸어도 벗어나기 어려운 다층적 억압이 놓여 있다는 노골적인 증명인 셈이다.

어릴 때 보던 <마징가Z>에는 ‘아프로디테A’라는 로봇이 나왔다. 원뿔형 가슴 모양 장갑을 달고 노골적으로 하이힐에 비키니를 입은 로봇은, 가슴에서 미사일을 쏘았다. 그 로봇이 여성에 관한 나의 인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페호’가 달린 잠수복을 보았을 때 페트로니우스가 느껴야 할 절망의 깊이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여성의 힘’, ‘여신의 무의식’, ‘자궁과 달의 힘’에 관한 여성주의 서적이 잔뜩 출판되고 있었다. 나는 그걸 읽으면서 여성이 가지는 원형적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존재일지 모른다고 애원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이 소설에서도 남성들은 “어쩌면 남성들은 지금보다 더 근육질이고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고대 서적을 통해 잃어버린 남성성을 재해석하려고 시도한다.

아프로디테A

남성들은 이 소설을 비극으로, 여성들은 희극으로 읽는다는 서평을 보았다. 글쎄, 나는 이 평가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 한 이유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페트로니우스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고, 읽는 누구라도 페트로니우스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을 읽고 페트로니우스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나름대로 대단한 일일 것이다. 왜냐면 바로 소설 속 페트로니우스가 겪고 있는 일이야말로 바로 이 세계의 절반이 처해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 반이 다른 반으로 이양해간다고 할지언정 이 불합리함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통쾌함이나 짜릿함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이런 억압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향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2015년 ‘메르스 갤러리’가 생겼던 당시, 그곳에서 한국의 ‘이갈리아’를 연기하던 사람들은 종종 고통을 호소했다. “씹치 새끼들은 어떻게 이걸 하루 종일 하고 있노? 여기 사흘만 출석했는데도 돌아버릴 것 같다 이기.” 그럴 때마다 함께 “머리를 풀고 달리던” 여성들은 잠깐 컴퓨터를 끄고 밖에 나가라고 권했다. 나쁜 이데올로기와 싸우다 ‘돌아버린’ 사람들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쁜 이데올로기에 오래 노출되면 사람들은 다양하게 변화한다. 아무렇지 않게 여성들의 몸을 부위별로 나눠서 평가하고, 여성들에게 서로 다른 이중적 잣대를 강요하고, 그 복잡다단한, 도무지 어떻게 해도 맞출 수 없는 잣대에 맞춰지지 않는 여성들의 정신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튀어나온 팔다리를 보듯이 잘라내는 그 수많은 ‘여성혐오자’들이 그렇듯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남성(멘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 거야. 만일 남성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만일 남성이 제지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거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서, 여성들이 아이를 키우지 않아서, 여성들이 낙태를 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조신하지 않아서, 여성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수많은 이야기를 우리는 아직도 듣고 있다. 누구도, 어떤 성도, 어떤 메이저리티와 마이너리티도 이런 억압을 강요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책 전체로 몸부림치듯 외치고 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고. 어떻게 뒤집고 다시 말해도, 이것은 명백한 차별이며 정당화될 기제조차 없는 것이라고. 나는 페트로니우스와 나의 고통에 공명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삶은 이미 충분한 비극이다.

오늘은 SNS를 하다가 운동권을 배제한 낙태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일부 사람들이 “생물학적 남성은 참여하지 말라”는 공지를 띄운 것을 보았다. MTF 트렌스젠더 여성들이 자신들은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반박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녀들에게 “남성으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여성이라고 착각하는 정신병자”라는 의미의 ‘젠신병자’라는 단어를 붙였다. 페트로니우스의 고통에 대해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n개의 성 중에 어떤 것도 그 젠더와 섹슈얼리티만으로 억압받지 말아야 하는 이 총체적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메갈리아’를 말할 뿐만 아니라 ‘이갈리아의 딸들’을 인식해야 한다.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그 세상을 꿈꿨던 상상력을 기억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강요된 “우리의 자리를 지키지” 않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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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이서영

앉으면 졸리고, 걸어가면 넘어지고, 먹으면 흘리고, 들고가면 쏟는다. 직장을 다니며 소설도 쓰고 칼럼도 쓴다. 저서로 단편집 '악어의 맛'과 '공동작품집 '이웃집 슈퍼 히어로'와 '일 못 하는 사람 유니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