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인터뷰] “제일 먼저 망한 게 ‘사랑’이었다” – 엄기호, 대학 강의 떠나 10주간 ‘사랑’을 강의하는 이유

핵미사일이 날아다니고, 경제도 위태롭고, 정치도 황망한데 ‘사랑’ 운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일까? 아니다. 세상이 망가져 가는 양상이 과거와 다르다. 체제의 붕괴 이전에 우리는 ‘사람’의 붕괴를 먼저 보고 있고, 그 핵심에는 ‘사랑’의 붕괴가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망했지만 제일 먼저 망한 게 사랑”이었음을 감지한 사회학자 엄기호는  밀도있게 대중과 만나 공부할 장을 펼치겠다며 대학 강의실을 나왔다. 그가 감지한 붕괴의 징후와 현상은 무엇이며, 그럼에도 왜 여전히 ‘사랑’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지 청어람은 앞으로 10주간 그와 함께 ‘사랑의 인문학’ 혹은 ‘사랑의 사회학’을 탐색하고자 한다. 강좌에 앞서 그가 앞으로 펼쳐낼 ‘사랑’ 이야기의 설계도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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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양) : 반갑습니다. 여러 권의 책으로도 알려져 있고, 유명 강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대학 강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죠. 사람들이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어떤 생각이신 건가요?

엄기호(엄) : 어제도 시간 강사인 후배와 통화하면서 신세 한탄을 한참 들었어요. 제일 큰 질문은 “지금 대학에서 교육이라는 것이 가능한가?”입니다. 일단 학생들의 변화도 있고, 학교 제도의 변화도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상대 평가제’가 도입되면서 그 속에서 엄청나게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고교 교사나 대학 강사들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평가의 공정성을 확보해야 하죠. 안 그러면 난리가 나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가르치는데 집중할 수가 없고요. 저처럼 학점에 신경 쓰지 말고 ‘수업을 하자’ 이렇게 강의를 하더라도, 중간고사가 지나면 어쩔 수가 없어요. 학점을 못 받으면 취직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되기 때문에 학생들도 엄청나게 초조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좋은 분위기에서 강의를 잘했다 하더라도 끝에 가서 약간의 원한 감정 같은 것을 가지는 경우도 생기니 가르치는 사람들도 무서워지는 거죠.

양 : 그 정도까지 분위기가 험악해지는군요.

엄 : 학생들도 소비자 의식이 발달하면서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혜택이 되지 않으면 화를 내는 경우들이 생기는 거예요. 대학 강사 같은 경우는 매 학기 다녀야 하잖아요. 그런데 강의평가서에 저주 같은 걸 쓰는 친구들도 있어요. “당신을 보는 눈이 많다는 걸 명심하기 바란다”든지… 많지는 않지만 이게 100명 중 1명이더라도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서운 이야기거든요. 가르친 내용에 불만이 있거나 동의하지 않더라도 교실이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이미 대학에서 교육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거죠. 제가 지난 학기 서강대에서 강의했는데, 되게 좋았거든요. 분위기도 좋았고, 학생들도 좋았고, 저도 좋았고. 그래서 살짝 망설이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건 예외적인 케이스에 가까워요. 저는 가르치고 배우고 서로 성장을 도모하고 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사람인데 이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양 : 대학이라는 공간이 일종의 학교실패, 교육실패를 겪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그만두겠다는 결단이었군요. 그러면 그 취지를 대학 바깥 공간에서 살릴 수는 없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따라 나올 것 같아요.

엄 : 저는 그 부분에서도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5년, 10년 전까지 우리가 주로 이야기했던 것이 ‘교실 붕괴’라고 주로 중등교육의 붕괴를 염려했는데, 지금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대학교육이에요. 고등교육은 제가 볼 때 이미 붕괴를 했다는 거죠.

그런데 사람이 가르치고 배우고 서로 성장을 도모하는 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게 어디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질문이 나오죠. 대학 이후에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어떤 문제를 직면하게 되면 그 문제를 바로 보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생기는 것 같아요. 이게 제가 <공부중독>이나 <공부공부>에서 이야기했던 ‘삶과의 대면’이라는 것인데, 이전에는 중등학교 때나 대학에 가면서 사회랑 부딪히게 되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했었지만, 지금은 졸업 이후로 직장생활 시기로 유예가 된 거죠.

저는 오히려 삶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하고 만나서 얘기를 나눠야 그 절실함이나 깊이가 훨씬 더 잘 확보가 되더라는 생각을 해요. 지난 한 5년 동안 정말 많이 느꼈어요. 예를 들면, 도서관 강의라던가 또는 평생학습관 같은 데 있잖아요. 이전에는 약간 우아하고 고상하게 교양 쌓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면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요즘은 20대 후반-30대 초반에 “내가 하는 게 왜 이 모양인가?” 고민하는 사람들, 그리고 40대 초반 이후 삶의 전환기를 맞이하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들 있잖아요. 이런 분들과 같이 공부하면 굉장히 잘 됩니다. 그분들은 대안을 내놓아라 이런 요구 안 해요. 즉각적 대답,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는 말이냐” 이런 이야기 안 해요. 그리고 학점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정말 같이 고민하는 것에 정말 충실할 수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번에 청어람에서 하는 강의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요. 저는 거기서 이런 공간들을 만들어 내는 게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하는 게 불가능해진 ‘대학’을 나오다

양 : 10주간 재미있는 자리가 되겠군요. 이번에 준비한 강좌 키워드가 ‘사랑’이잖아요? 왜 사랑인가, 도대체 사랑이 어쨌단 말이냐. 온갖 질문이 쏟아질 것 같은데요.

엄 : 대학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강의를 하거나 사람들 만나면서 많이 느끼는 건데 많이 붕괴했어요, 사랑이라는 게.

양 : 아니 세상에 붕괴한 것이 사랑만 아니고, 다 붕괴했는데 왜 유독 사랑을 끄집어내었냐는 말이죠.

엄 : 다 붕괴했죠, 다 붕괴했는데… ‘사회’라고 하는 것이 있잖아요. 이 사회를 만드는 굉장히 중요한 원동력이 사랑이었거든요. 사랑이라는 가치 또는 사랑이라고 하는 방법론 위에 만들어진 게 이 사회이죠. 이 사랑이라는 건 중세 이전의 사랑하고는 다른 거거든요. 근대사회에서 사랑이라는 건 ‘내가 누군가를 존중하고 누군가로부터 존중받는 최초의 상호적인 자존감’ 있지 않습니까. 이걸 가질 수 있을 때 존재감을 가질 수가 있게 되죠.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걸 시작해보자는 의미죠.

제가 좋아하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1970년-80년대 때 노동자 부부들이 서로 얼굴도 잘 모르다가 결혼한 첫날밤에 둘이 손을 꼭 잡으면서 “우리 정말 한번 열심히 살아봅시다”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낭만적 사랑이나 연애에 기초한 그런 사랑은 아닌 것 같지만, 저는 이런 것이야말로 근대적 사랑의 핵심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둘이 손 꼭 잡으면서 우리 열심히 살아봅시다, 그게 새로운 걸 탄생시키거든요.

그런 식으로 새로운 것이 가능한 건데 ‘사랑의 종언’이라는 건 이 가능성의 종언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 누구도 ‘새로운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고, 그러면 그 사회는 끝난 사회인 거죠. 그리고 그 사회만 끝난 게 아니라 그 삶도 사실은 끝난 삶이라고 봐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 왜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는가’ 이해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이 문제를 놓고 저출산 문제라거나 아니면 고실업이란 경제적인 이유로 연애도 안하고 결혼도 안 한다고 하고 있어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다른 측면에서는 이 사랑이라는 걸로 만들려 했던 그 관계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었다는 거죠. 여성혐오라던가 아니면 거의 젠더전쟁이라고 불릴 정도의 일들이 벌어지는 것도 그 안에 이미 어떤 비극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꼼꼼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는 거죠.

저는 이 사랑의 가능성이 종언하면서 바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혐오’거든요. 지금 많은 곳에서 혐오를 이야기를 듣지만, 사실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인데 많은 비그리스도교 신자들한테 혐오종교, 혐오세력이라고 지탄받고 있고 또 혐오의 대상이 돼버리고 있어요. 혐오가 왜 이렇게 보편화하고 만연하고 있는가, 왜 혐오의 감정, 혐오의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가, 왜 혐오의 방식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고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가. 왜 이렇게 되는가를 알려면 거꾸로 그 반대편에 있었던 사랑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양 : 어떤 분들은 ‘지금 우리나라가 안보위기, 경제위기, 정치위기 속에 처해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굉장히 뜬금없고 낭만적이고 지엽적인 이야기 아닌가‘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오히려 거꾸로 놓고 보면 이 모든 난관과 문제들의 바탕에 깔려 있는 사랑의 실패라는 것이 정치, 경제, 안보 온갖 다른 영역에서 표출되고 있는 양상으로 읽어낼 수 있겠네요.

엄 : 그렇죠. 내가 계속 여기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는데,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지키고 싶고 이런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랑이 사라진다는 건 지키고 싶은 게 없어지는 거거든요. ‘나도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건 ‘나도 별로 지키고 싶지 않’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서도 “다 리셋하고, 다 파괴되어버려라” 이런 마음 같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지킨다고 하는 건 보수적인 게 아니거든요. 지킨다는 건 계속 새로운 걸 탄생시키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건데 그것이 없어져 버리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엄청난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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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사랑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양 : 사회학을 공부하셨고 인류학적인 접근도 많이 하시는데, 이번 강의 주제나 내용을 보면 여러 학자와 책이 언급되고 있어요. 사람들이 약간 겁먹을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이게 어마어마한 학술적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강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정말 이 강의를 들으면 연애에도 도움이 되고 가족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이런 걸까. 어떤 분위기의 강의가 될까요?

엄 : 저는 제가 잘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가 대학에서부터 대학원, 아니면 일반 강의 갔을 때 제가 듣는 유일한 칭찬 중의 하나가 엄청 쉽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제가 이제까지 쓴 책 평가를 보면 전부 다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고 하죠. 저는 당연히 고도의 학술적인 논의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허접하거나 얕게 하는 것도 안 좋아해요.

제가 잘 쓰는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프랑스 6.8혁명 때 나온 “구조는 길거리에 걸어 다닌다” 구조가 추상적인 게 아니거든요. 이런 걸 공부하는 것은 정말 내 눈앞에서 내 삶과 내 행동과 내 감정의 장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 구조를 맞닥뜨리고 그걸 읽어낼 수 있는 힘을 키워내는 과정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 강의는 굉장히 인문적이지만 굉장히 실용적이에요. 내가 일상에서 구조에 부딪히고 있고, 그게 내 삶에 한계를 주니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죠.

제가 이번에 서강대에서 ‘민주주의’를 주제로 했는데, 숙제가 뭐였냐면 자기 부모님이나 조부모를 인터뷰하기였어요. 그래서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 인터뷰를 해서 숙제를 하는 것이었는데, 학생들은 진보적이니까 부모랑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이제까지 얘기해본 경험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처음 해보는 거예요. 별 희한한 사건이 다 벌어졌어요. 싸우고 치고받고 난리가 났는데, 그게 잘 됐다, 잘못됐다가 아니라, 그다음 수업에 와서 “선생님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서 같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현명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처럼 저는 이번 강의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합니다.

“구조는 길거리에 걸어 다닌다”

양 : 전체 강의가 굳이 기독교적 논의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 강의에 많이 오시는 분들이 기독교인들이긴 합니다. 어떤 통찰이나, 적용점이 있을까요?

엄 : 아무래도 청어람이니까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이야기를 하고 이 사랑이라는 게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굉장히 강력한 힘이었거든요. 저는 ‘제국에 맞서는 힘’이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라는 게 ‘나 너 좋아’ ‘너나 좋아해?’ 이런 게 아니라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로마제국이 가지고 있던 신분제 그리고 불평등에 대해 굉장히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이었죠.

그리고 그 ‘보편적 힘으로서의 사랑’이 로마의 제국종교가 되고 난 다음에 퇴락했다가 프로테스탄트 혁명을 통해 부활을 해요. 저는 그래서 근대를 만든 게 사랑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랑의 실제 핵심 중 하나가 ‘평등’ 제가 아까 ‘서로에 대한 존중’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용어가 될 수 있었던 건데요. 이번에 저랑 같이 이걸 공부하면서 우리가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해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게 뭐였던가. 그게 어떤 사회적 기능을 했었나. 그리고 지금 이런 국면에서 성 소수자들을 반대하는 거로 ‘사랑을 지킨다’고 했을 때 그 사랑이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인가. 사랑이 붕괴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보편의 원리라는 것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그럼 사랑은 어떻게 다시 사유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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