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칼럼] ‘이성애적 사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엄기호)

-엄기호 (사회학자, <공부공부> 저자)

이성애는 끝났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사랑과 연애, 결혼과 가족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인지하고 인정하고 있는 사랑과 결혼, 연애와 가족은 이 이성애에 기초하여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성애적이지 않은 것은 성행위이기는 했을지언정, 사랑으로, 연애로, 결혼으로, 가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직 이성애만이 그 연속성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성애는 우리 시대에 파산했다.

물론 이성애가 파산했다는 것이 사람들이 더 이상 이성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많은 섹스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서울에 한 집 건너 하나라는 모텔이나 저 수많은 대실 간판들이 그것을 보증한다.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섹스의 기회 속에서 고통받고 번민한다. 오로지 섹스를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까지 날아가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 기반을 두어, 결혼과 가족을 이루는 기초로서의 이성애는 종말을 고했다. 아니 이성애는 이제 사랑이 아니라 ‘연애’의 기초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초식남’ 등의 말은 비록 인구의 소수라고 할지라도 이성애에 기초한 ‘연애’가 얼마나 귀찮고, 번거롭고, 피곤하고, 머리 아픈 일이 되었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연애’를 하지 않고 ‘도구화된 섹스’만 한다. 이것이 이성애가 파산했음에도 이성애 성교 행위는 계속 가능한 이유다.

정말 ‘동성애’가 ‘이성애’를 몰락시키고 있나?

이성애가 종말을 고한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온전히 이성애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 그리고 이성애자들의 ‘무능’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가족의 붕괴와 사랑의 종말, 연애의 불가능함은 동성애와 전적으로 무관하다.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에 무관한 만큼이나 이성애의 몰락과 동성애는 무관하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사랑이 망해버린 것을 동성애에서 찾는 것은 이성애의 몰염치과 무능의 또 다른 민낯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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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다룬 드라마를 반대하는 광고. 사진출처 : ‘인아’보고 게이되면 ‘공신’보면 서울대 가나?’ (한겨레, 2010.10.19)

그렇다면 이성애는 왜 망했는가? 무엇보다 이성애는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존중’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타인을 성적으로, 사랑하는 이로, 같이 삶을 나누는 반려자로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성애는 무지했고 무능했다. 그 결과 존중을 받지 못하는 쪽(구조적으로 여성)이 더 이상 이 관계를 유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이 이성애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존중이란 무엇인가? 근대적 개인에게 존중이란 ‘나’라는 사람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 대하는 것이 ‘존중’이다.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사람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럴 때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 그 사람에게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그것을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이에게서 받고 싶은 것이다.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나로서의 나. 우리는 이것을 ‘인격’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성애는 도통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람’으로 대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대신 이성애가 발달시키는 것은 기가 막히게도 그 사람을 반대편 ‘성’으로 대하고 그렇게 대하는 것을 ‘존중’이라고 불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여성’으로 바라보고 ‘여성’으로 대하고 ‘여성’으로 여기는 것을 존중이라고 불렀다. 마치 박근혜 전 대통령을 끊임없이 ‘여성’으로 부르며 그를 ‘여성’으로 대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여성’으로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한 여성은 거의 없다. 대부분 모욕이라고 느꼈다.

그 결과 존중받을수록 인격이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는 역설이 이성애에는 구조화되고 말았다. “저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여성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라는 말은 이 존중이 모욕으로 도착되는 것을 정확히 보여준다. 우리 모두 안다. 당신이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는지를.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만나는 여자를 ‘그’로 생각하지 못하고 ‘여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무엇도, 누구도 아닌 ‘그’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가한 것이다. 인격에 대한 모욕 말이다. 그러면서도 이 모욕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상대가 이것을 참고 감수하며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동안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게 바로 사랑이었고, 다른 건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받기 위해서는 이 사랑을 응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흐름에서 여성들도 이것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였고 ‘나’가 아닌 ‘여성’으로 살아가고 여성으로 사랑받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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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딸, 아내, 며느리, 엄마 등 수많은 ‘무엇’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한다. 출처 : 웹툰 <며느라기> 중

여성이 ‘나’가 아닌 것은 그 이후로도 이어진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너’이기 때문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여성’으로 좋아한다. 그리고 난 다음 그 ‘여성’은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이 사람에게는 그 어디에도 ‘나’로 존재할 시공간은 없다. 단지 역할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나’가 될 수 있는 시공간은 박탈당한 채 오직 역할로만 존재하고, 그 역할로만 존중받는 것, 이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씻을 수 없는 모욕이다. 그래서 존중받을수록 모욕당하는 것이 구조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역할을 거부하고 역할 없이 살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이란 그런 역할들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개체적 인격은, 아니 그 개체적 인격으로 ‘나’가 존중받는다는 것은 그 역할들로 환원되지 않는, 대체되지 않는 고유한 그 무엇이 있으며, 바로 그렇다는 것을 존중받을 때 비로소 ‘나’로 존중받는다고 할 수 있다. 나의 고유한 인격은 그 수많은 역할과 나 사이이 차이로 존재한다.

이 차이에 근대인의 특징인 자율과 자유, 그리고 평등이 있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차이가 있는 만큼 나는 자율적인 존재다. 그 차이의 거리가 딱 나의 자율성이 된다. 그리고 이 자율성이 바로 나의 자유가 된다. 이 차이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역할에 대한 순종, 충실한 역할 놀이라는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정해진 역할의 노예이지 역할을 다루는, 그래서 다른 존재가 되는 자유는 없다. 자유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평등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애는 특히 여성을 역할로만 존중하고 열광하는 법만 알았지 그 역할과의 차이로 존재하는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법에 관해서는 무지하고 무능했다. 연인으로서의 그녀, 어머니로서의 그녀, 아내로서의 그녀를 칭송하면 그것이 그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성애는 여성을 역할이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대하는 법에 관해 전적으로 무지했다.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여성들이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모욕’임을 깨닫는 순간에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여성들이 나를 여성이 아니라 ‘나’로 대해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즉 사회학에서 말하는바 ‘여성들의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필연적으로 닥칠 수밖에 없는 저 사랑(모욕)의 운명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가 너를 여성으로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지 말하며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반대쪽에서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 모욕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모욕을 사랑으로 둔갑시킨 죄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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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는 직시해야 한다. 이성애는 망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들의 무능과 무지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그것이 그나마 그동안, 아니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이성애라는 죗값에 관해 그대들이 속죄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이성애는 일말의 회생 가능성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대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이제 서로 사랑하는 존재를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지 않고, 오직 ‘그’로 보고, ‘그’로 대하는 것 말이다. 그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 남자와 여자라는 것으로부터 차이가 있는 만큼 그가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성애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 마디로 이성애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이를 ‘성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체적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성애는 이 길에 관해 철저히 무지하고 무능했다. 이 무지와 무능의 결과 이성애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를 ‘여성’으로만 대하는 그런 사랑은 이제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를 여성이 아니라 ‘그’로 대하는 것은 이성애자들의 무능 때문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성애 ‘섹스’는 가능하지만, 이성애에 기반을 둔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이 이 시대가 이성애 섹스는 기기묘묘하게 넘쳐나지만 사랑은 구석기 시대보다 더 빈곤해진 이유다.

가소로운 것은 자신의 무능에 의해 무너진 이성애가 그 죗값을 동성애에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점이다. 동성애 때문에 사랑과 결혼, 연애와 가족이 망한 것처럼 말한다. 동성애가 성적 쾌락에 대한 탐닉 속에 도덕을 벗어던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동성애를 억압하고 동성애자들을 탄압하면 다시 이성애에 기반을 둔 사랑과 가족이 돌아올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성애는 무능과 무지를 넘어 이제 자신에 관해 비열해지기까지 한 것이다.

아니다. 이성애는 직시해야 한다. 이성애는 망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들의 무능과 무지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그것이 그나마 그동안, 아니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이성애라는 죗값에 관해 속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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