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인터뷰] “결국, 주체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 양현혜, ‘100년 전 예언자’를 소환하는 이유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돌아볼 때 끌어들여야 할 역사적 자원은 마르틴 루터와 유럽의 중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백 년 전 격동의 동아시아 상황에서 오늘 우리가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현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저마다의 독특한 목소리로 대답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청어람은 오늘의 한국사회와 교회를 관통하는 문제에 직면하기 위해 세 사람을 소개합니다.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 가가와 도요히코.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의 진정성을 향해 거침없이 추구했던 대표적 인물이자, 그 전방위적 영향력이 교계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되는 이들입니다. 당대의 제도교회가 흘러갔던 대세에 영합하지 않은 이들의 궤적을 발견 혹은 재평가 하며 오늘 우리 신앙의 좌표를 설정해 보는 강좌를 준비하며 우리를 '100년 전 예언자들'과 만나게 할 매개자, 양현혜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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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청) : 반갑습니다. 교수님. 최근 <우치무라 간조> 책도 내시고, <김교신의 철학>도 쓰셨는데 교수님의 연구 관심사가 궁금했습니다.

양현혜(양) : 저는 동아시아 기독교사를 연구하고 있어요. 주로 한국과 일본, 가능하면 중국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 영역에서 기독교, 근대성, 오리엔탈리즘 문제,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 문제. 이런 네 가지 축으로 각국의 기독교사를 비교 연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역할과 기능 같은 주제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공신력을 잃었지만, 가능하면 우리 학교에 온 학생들이 기독교가 사실은 이런 대단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 복음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킨다는 것을 알고, 그 정신을 한 번 맛봄으로써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자원이고 원천이라고 느끼고 가도록 하는 일을 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100년 전과 지금의 한국 사회와 기독교는 무엇이 같은가?

청 : 이번에 청어람이 기획하는 강좌는 한국사회와 기독교의 백 년 전 시대를 되돌아보자는 것인데, 역사학자이시고 주요 관심사가 일본 강점기와 그 전후인데, 과연 그 시대를 공부하면 오늘날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까요?

양 : 저는 굉장히 많이 도움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관계의 축이 변하고 있잖아요. 그때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 질서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지키기 위해 동아시아에서 몸부림친 나라가 우리 한국이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는 서구화되기 위해 몸부림쳤다면 우리나라는 그 에너지를 아름다운 중화적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나라가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듯 전부 쏟아부었지요. 그렇게 했는데 그 세계가 변했잖아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세력에 의해서 근대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중국 일변도의 세계가 아닌 다른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우리가 100년 전에 너무나 큰 시행착오를 겪었잖아요. 그래서 지불한 대가가 식민지 36년이었지요.

오늘날에도 공교롭게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엄청나게 변하고 있죠. 해방 이후에는 한·미·일이라고 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 세계를 지키고 그 우산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중국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면서 우리가 한·미·일 체제에 있어서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수밖에 없는 처지죠. 이제는 중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체제에서 우리가 어떻게 양자를 균형 잡는 매개자 역할을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에요. 이렇게 다시 한번 국제질서의 축이 변하는 그런 길목에 살고 있기 때문에 120년 전의 한국사회를 본다는 게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지점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 : 연구해보니 길이 보이시던가요?

양 : 한국사회는 국권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라가 망하면 망할수록 기독교가 성장해왔어요. 흔히 사람들은 일본 같은 나라는 저렇게 세월이 지나도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데 한국은 너무나 뿌리가 잘 내려서 다행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양쪽 다 비정상이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뿌리가 안 내리고 인구 1억 2천에 가톨릭, 개신교 합쳐서 영원히 백 만도 안 되는 나라나, 어느 순간에 갑자기 기독교만 천만이 되는 나라나, 과소 과대가 다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민족사의 불행을 딛고 개신교가 이 땅에 정착해서 오늘날과 같은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불행하지 않았다면 개신교가 이렇게 성장 안 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성장한 게 꼭 좋은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저는 불행 가운데 성장해서 정신적으로 엄청난 보고를 가지게 되는 선물은 받았다고 생각하지요. 한국 역사에서 개신교의 정신이 제대로 살아서 정말 사회를 변혁시키는 역할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두더라도,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이런 개신교의 정신이 접맥되고 씨를 뿌렸다는 건 대단히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뿌리 내리기 위해 한국이 다시 불행해지자, 그것에 관해서는 반대하죠. 그럴 필요는 이제 없고, 오히려 한국이 안정된 상태에서 싹을 틔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교신 – 참 기독교는 어떻게 발견하여 살아낼 수 있나?

청 : 동경대에서 쓰신 학위논문이 ‘윤치호와 김교신’이었습니다. 책으로 출판되어서 널리 읽혔는데, 몇 년간 국정교과서 파동이나 우파 기독교의 역사관 논란 등을 거치면서 쓰신 내용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의 반응을 얻으셨을 것 같아요. 어떤 반응을 얻으셨는지, 이런 연구를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양 : 두 가지 질문 하셨는데 순서가 바뀌어도 되겠죠? 일단 연구의 계기는 제가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그때는 한류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위협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집을 얻어야 하는데 “물장수하고, 파친코하고, 조센징한테는 집도 안 보여준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서는 결코 살아보지 못한 열악한 지역에서 살았어요. 일본에는 외국인 등록증에 지문날인을 합니다. 일본사람은 지문날인 안 한단 말이죠. 일 년에 한 번씩 지문 날인하러 갔었어요. 한국말처럼 일본말도 경어가 굉장히 발달한 언어에요. 그리고 겸양어도 엄청나게 많이 발달했지요. 그렇게 비자를 갱신하러 갈 때는 출입국관리소의 직원들이 우리를 국적이나 나이 혹은 성별과 관계없이 무조건 반말을 쓰는 거예요. 제가 거기서 한국에서 받지 못했던 대접을 받으며 국가가 무너졌다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저도 한국인이라는 것이 굉장히 부끄러워지려 하고, 사람들 눈치가 자꾸 보이더라고요. 입 다물고 있으면 내가 일본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하면 입 열고 싶지 않고 , 자꾸 위축되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도대체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게 뭔가, 이게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화두였고요.

민족적 정체성이랑 부딪치는 문제가 여러 가지겠지만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유교 같은 조선의 재래적 정신에서 전향한 거잖아요. 개종한 거죠. 민족적 정체성에서 물리적으로 국가적 틀이 깨졌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쪽에 거의 투항을 해버린 거죠.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민족적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는가. 기독교라는 건 서구 근대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항상 민족적 정체성을 해체하는 역할밖에 못 하는가, 아니면 이것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 어떤 내적인 매개도 제공할 수 있는가. 저는 그런 걸 알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 문제를 가지고 격투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극과 극의 결론에 이르는 두 사람을 발견한 거죠. 한 사람이 윤치호예요. 이 분은 서구 근대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와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굉장히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을 사랑할수록 나의 ‘조선인 됨’을 부정하죠. 그분의 일기에 나오는 것을 보면, 전통적인 정신을 콘크리트 깨는 것처럼 정말 의식적으로 깨는 게 애국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김교신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기독교를 믿기 이전에 나의 조상들, 그들의 정신문화에 대한 자긍심이나 기억의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나는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의 혼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을 때만 진정한 기독교가 조선의 종교가 되는 것이고 한국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 이런 결론에 이르러요. 같은 종교를 가지고, 같은 사회를 살았는데, 극과 극의 결론에 이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분들을 케이스 스터디로 다루게 된 거죠.

청 : 결국 윤치호와 김교신이 비교되면서 김교신 선생이 부각되는 결과가 되었는데, 반응이 궁금합니다. 한국의 우파, 기독교인들은 윤치호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지금도 하고 있거든요.

양 : 저는 윤치호라는 분도 전혀 모르고, 김교신이라는 분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누구 편을 들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고요. 이 두 분이 자료를 가장 많이 남기신 거예요. 윤치호 일기는 젊어서부터 돌아가실 무렵인 1945년까지 영어로 엄청나게 많이 쓰셨어요. 요즘은 윤치호 유족들이 잘 공개를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심지어는 좋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을 따로 두 권으로 묶어서 내고 그랬어요. 역사라는 건 굉장히 엄정하거든요. 때로는 기록을 발췌하거나 말소할 수 있지만, 영원히 기록을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김교신도 일기가 있고, <성서조선> 영인본을 남겨주셨어요. 제가 선입견을 품고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분들 자신이 말하게 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자료를 남겨주셔서 참 감사했고요.

이렇게 논문을 썼는데 평가는 굉장히 엇갈리죠. 한국 기독교에는 윤치호 쪽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분이 너무 많아서, 어떤 분들은 ‘네가 뭘 몰라서 이렇게 쓴다, 한국에서 윤치호를 다루는 건 1905년까지만 다룬다(그때까지는 윤치호가 나름대로 계몽적인 역할을 한국사회에서 했거든요). 그 이후는 다루지 않는다’는 거예요. ‘뭐 때문에 45년까지 다뤘냐. 책을 내지 말라’는 말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간이 많았어요. 그 때문에 서울에서 강의할 수 없었고, 전주로 내려가서 7년 동안 있다가 왔죠. 그런가 하면 또 심지어는 ‘이 논문에서 너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하나도 안 쓰고 절대자라고 썼는데 그것만 봐도 너는 공산주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고. (웃음) 그분들이 말씀해주셔서 제가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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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 첫 논문 이후로 김교신 선생에 관한 연구를 굳게 붙잡고 오신 거로 알고 있고, 최근에 <김교신의 철학>이라는 책도 내셨습니다. 김교신 선생에 꽂혔다고 해야 하나요. 어떤 의미에서 연구를 해오고 있으며, 어떤 맥락에서 소개되어야 한다고 느끼시는지요.

양 : 제가 꽂힌 이유는 김교신 선생도 혹독한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에서 제가 겪었던 그런 욕된 감정 ‘조선인인 나를 저 사람들이 해체하려고 하는구나’ 이런 걸 더 강도 깊게 느끼셨을 거라는 말이죠. 근데 그걸 기독교라는 사상을 가지고 정면 돌파하셨던 점이 저는 너무 멋있어요. 이 분이 잘생기셨어요. (웃음) 사실 윤치호와 김교신을 재어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세속적 지위 같은 건 김교신 선생이 비교가 안 되잖아요. 그러나 역시 역사라는 것은 시간이 사람을 심판하는 기록이기 때문에, 가장 잘 나갔을 때가 양정고등학교 교사였고, 경기고등학교 6개월 근무한 이 평교사가 문제적 인물이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역사라는 건 이렇게 엄정하죠.

저는 김교신 선생을 보면서, 남들이 가르쳐주는 이야기를 믿지 않고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자신이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정말 투철하게 노력하셨다, 이분에게 있어서는 기독교가 쓸데없는 옷들이 다 벗겨지고 정말 엑기스만 남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을 자기 일상의 삶에서 지독하게 실천을 하지요. 제 생각에는 45세에 장티푸스 걸려서 돌아가셨다지만, 그렇게 삶을 길이로 살지 않고 1시간을 10시간 같은 밀도로 꾹꾹 눌러사니까 45세에 그런 병에도 걸리지요. 윤치호처럼 자기 건강관리하고, 위생 생각해서 ‘이를 열심히 닦아라’ 이렇게 살았다면 장티푸스도 면역성이 좋아서 안 걸렸을 거예요. 그렇게 삶을 자신이 생각하는 소중한 가치에 밀도 있게 헌신해서 사는 사람. 그러면서도 여의치 않은 식민지 상황을 정면 돌파하죠. 김교신 선생에게 있어 기독교는 무엇인가에 관해 여러 가지 층위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그분이 제일 중요하게 말하는 건 ‘죽음을 이긴 종교다’라는 것이에요. ‘세속의 권력, 너희들 대단하다. 그래 봤자 육체를 죽일 뿐이지 내 영혼은 못 죽이지 않나. 나는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분 앞에서 두려워하고 살 것이다’라고 학생들에게도 이야기해요. 이렇게 두려움 없이 아름답게 살기가 쉽지 않아요. 지위가 올라갈수록 지켜야 할 게 많아지기 때문에 두려운 것도 많아지잖아요. 결정적인 순간에 돌이키지 못하고 추해지는데 이 분은 정말 그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위해 살기 위해 매진하면서 마지막까지 ‘나 언제 죽을지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받아야 할 그 화인이 없을까 봐 그것을 걱정하고 그걸로 내 삶을 채우는 데 매진하겠다’ 이거였거든요.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조선의 재래적인 정신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해서 계승하면 우리가 더 아름다운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면서 기독교와 민족적 정체성을 연결하기 위해 굉장히 애를 쓰셨죠. 이 분을 보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한국인이 되어야 되는구나. 그런 걸 느끼면서 굉장히 안심할 수 있어요.

우찌무라 간조 – 변혁 사상으로서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실험하다

청 : <우치무라 간조> 책을 올해 내셨어요. 김교신 선생의 스승이지만 젊은 세대는 전혀 접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 봅니다. 어떤 이유에서 김교신 선생에서 우치무라 간조로 관심사가 확장되었는지, 그 책을 쓰시면서 새롭게 정리되거나 발견하신 내용이 있는지 말씀해주시죠.

양 : 지식사회학에 보면 칼 만하임이 종교의 기능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잖아요.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이랑 ‘유토피아적인 기능’ 종교가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문제는 종교가 유토피아적 기능이 있다는 것. 이에 관해 더 많이 주목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기독교가 엄청난 역사변혁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떠한 사회변혁 철학에 못지않은. 왜냐하면, 그 힘은 사회만 변혁시키려는 게 아니라 그 사회의 불의한 구조를 만드는 사람인 나 자신을 변혁시키면서 내가 변혁되는 것만큼 사회가 변혁된다고 보기 때문이죠. 동아시아에서 변혁 사상으로서 기독교를 생각한 원류가 우치무라 간조라고 생각해요. 당시 일본이나 중국의 기독교인 중에서도 헌신적인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지요. 하지만 스스로 기독교 사상을 충분히 소화하고 흡수해서 자신의 말로 그 사상을 전달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요. 그 사상을 가지고 사유실험을 하고 그것을 실천실험까지 한 사람은 더 드물죠. 그런 의미에서 우치무라 간조는 짧은 일본기독교 역사에서 정말 대단한 선물이라고 봐야겠어요.

우치무라 간조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봐야 해요. 기독교인이 항상 복음을 이야기하지만 그 복음과 짝을 이루는 예언을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특히 동양에서. 때에 따라서는 복음과 예언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예언을 점치는 것인 줄 아는 사람도 너무 많고요. 근데 우치무라에게 놀라운 건 복음과 예언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공속(共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굉장히 뚜렷하게 있어요. 예언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 그리고 세계사에 있어 민족의 사명, 그리고 이 사명이 자기 민족의 자기도취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역사에 무엇을 공헌할 수 있겠는가, 이런 보편적인 지평까지 확장되는 것이 우치무라의 사유실험입니다. 우치무라의 이런 실험이 동아시아 전체 아니면 세계 교회사에 굉장한 자산으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치무라의 사상이 (물론 김교신의 스승이라는 점도, 함석헌의 스승이기도 하고요)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함석헌이 우치무라를 만나지 않았으면 오늘의 함석헌이 될 수 없었다고 봐요. 그분들의 사상적 계보를 알기 위해서 우치무라를 봐야 했었지만, 그것보다 동아시아 전체가 유교 문명에서 강제로 자본주의 문명으로 편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그것이 쓸데없는 옷을 다 벗어버리고 기독교의 본질적인 사상에 접목해서 변혁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런 사유실험, 그리고 실천실험을 한 사람으로서 우치무라의 삶과 사상이 굉장한 자산이 된다고 생각하여 이 사람을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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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주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청 : 이제 다섯 번에 걸쳐 강좌를 진행할 예정이죠. 우치무라 간조 세 번, 김교신 한 번, 가가와 도요히코 한 번, 이렇게 쭉 보려고 하는데. 특별히 오늘의 젊은 세대와 백 년 전 동아시아의 기독교 사상-실천가들이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양 : 이것과 연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사람이 산다는 건 뭔가, 결국은 주체로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주체로서 산다는 건 매 순간 선택 가능한 몇 개의 선택지가 있는데, 그것을 다름 아닌 자신이 선택하고 거기서 오는 모든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산다는 건 선택과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어느 시대나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엄정한 삶의 진실이에요. 그 주체라는 것이 특히 화두가 되는 시기가 있어요. 120년 전 동아시아가 강제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문명으로 들어갈 때 완전히 주체가 붕괴되는 경험을 하지요. 내 부모님 때까지는 이런 식으로 살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세계가 다 설명이 되고 내가 누군지 너무 확실한 것이죠. 근데 120년 전 그 시대에는 분명한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 붕괴되고 해체되는 시대죠.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가 무엇인가를 내가 찾아야 했죠. 그리고 그 답이 보편적일수록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통찰력이 되는 것이죠. 질문이 같았으니깐요.

청어람 강의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젊은 사람들이 오는 게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기독교가 우리끼리만 통하는 암호같고, 너무 익숙하지만 아무 힘도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정말 대단한 힘이 있는데 그런 힘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나누고 싶어요. 오늘날의 한국사회도 주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화두가 되는 사회예요. 이러한 시대야말로 젊은 세대가 와서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주체가 무엇인가, 신 앞에서 내가 주체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관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그 격변의 시대를 주체로 살고자 할 때 그 힘이 어디서 오는가에 관해 생각하면서 격려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청어람 강의에 오시면 저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실 수 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들 정말 많이 와주시고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날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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