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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우리는 왜 ‘개인’으로 살기 어려울까? – 개인 없는 사회, 사회 없는 개인에게 필요한 것 (엄기호)

[인터뷰] 우리는 왜 ‘개인’으로 살기 어려울까? – 개인 없는 사회, 사회 없는 개인에게 필요한 것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개성 있는 개인’ 대신에 비슷한 스타일로 비슷하게 살아가야 안심하는 ‘공장형 인간들’이 더 보편적이다. '실존'으로서 개인이 없으니 사회가 도모되지 않고 사회가 없으니 개인이 존립할 수 없다. 이 강의는 근대적 사회 주체인 개인을 ‘빼어난 속물’이라는 관점에서 돌아보며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고자 기획했다. 지난 시즌 '사랑은 왜 망했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해 탐구한 사회학자 엄기호 연구활동가가 이번에는 '우리는 왜 개인으로 살기 어려울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어떻게 실존을 감당할 수 있는 기예를 가진 존재가 될 것인가 살펴볼 예정이다. 그에 앞서 강좌 설계도를 공개한다.

지난가을에 이어 청어람에서 두 번째 강연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들을 만나보니 어떤가요?

학교에서 사람을 만나는 건 연령적으로도 제한적이고, 요즘 학생들이 워낙 바쁘기 때문에 강의에 오는 사람은 제한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난번 청어람에서 강의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건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듣지 않을까?”였어요. 그런데 의외로 개신교 신자 아닌 분들도 있고, 개신교에 지쳤지만, 아직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었어요. 그런 분들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통과한 질문을 할 때 제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저한테는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죠.

너무 이상한 ‘또 하나의 가족’과 ‘가족 같은 회사’

이번 강좌 <개인은 빼어난 속물인가?> 부제가 ‘개인 없는 사회, 사회 없는 개인’입니다. 특히 ‘빼어난 속물’ 이런 표현을 쓰셨는데, 이 워딩에 핵심적으로 담고자 하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저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서로 ‘요구할 수 없는 것’ 또는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서로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진정성’이라는 겁니다. 지난 학기에 했던 <사랑은 왜 망했나?> 강좌와 연결해서 본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한테 굳이 진정한 모습을 기대하거나 진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기를 요구할 필요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관계가 아닌 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비인격적 관계(non personal)’로 대해야 한다는 거죠. 그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역할과 기능에 그 사람이 충실한가 안한가, 이게 중요한 거지, 그 사람의 내면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필요도 없고 사실은 알아서도 안 되고 물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역설적으로 사회라고 하는 공간에 있으면 서로를 비인격적으로 대해야 하므로 그 사람의 인격에 손상을 가하면 안 되는 거예요. ‘비인격적’ 관계라고 하여 ‘비인간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에요. 비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에 관해 내가 왈가왈부하거나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거든요. 대표적으로 회사나 학교 등의 공간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가 비인격적 관계라고 얘기가 할 수가 있는데, 지금 한국 사회가 보여 주고 있는 이 와장창한 모습 중 하나는 서로 비인격적으로 맺어져야 하는 공간에서 ‘또 하나의 가족’이니 이런 헛소리를 하면서 인격적인 걸 요구하는 거죠. 그것으로 그 사람의 진정성 또는 충심을 시험하는 것이고요.

한국 사회가 기능적으로 분화된 공간이 아니라 이런 곳에서 인격적인 헌신과 충심과 진정성을 요구하다 보니 다 교주가 되어 가는 거죠. 그래서 내가 선생이면 학생한테 ‘네가 정말 나의 학생인지를 증명하라’는 거죠. 이게 뭐냐면 ‘전인격적으로 나한테 복종하라’는 얘기가 되는 거거든요. 이런 흐름은 교회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회사에서도 마찬가지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고, 어느 공간에서도 지금 벌어지고 있어요. 이건 굉장한 비극이죠.

그렇기 때문에 ‘빼어난 속물’이라고 하는 의미는 이것이지요. 내가 어떤 공간에 갔을 때 상대의 민낯과 나의 민낯, 이 민낯을 서로 들이대고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가면을 쓰게 되죠. 그 가면에 충실하면 되는 거예요. 얼마나 충실하게 서로에게 수행해야 할 가면을 잘 수행하는가? 하는 점에서 ‘빼어난’이라는 말이 붙는 것이고, ‘속물’이라는 말은 (서로 가면을 쓰고 있다는 ) 그것을 그 사람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속물’인 거지요.

이런 식으로 본다면 ‘사회’라고 하는 공간 자체는 ‘사랑’과 연관 있는 ‘친밀성의 공간’하고는 전혀 다른 원리와 윤리와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의 최대치는 ‘빼어난 속물’이라고 봐야 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한국사회는 빼어나지도 않고, 속물은 속물이라고 경멸하면서 전인격적 착취가 역설적으로 가능해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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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극’ 하는 세상에서 ‘실존적 개인’으로 선다는 것

‘속물적이지 않은 인간’에 대한 추구는 전근대나 전통사회에서는 가부장이 됐든, 군주든 일체를 이루는 시대였던 것 같아요. 지금 우리는 근대를 거쳐서 포스트모던 사회까지 와 있는 상황인데, 근대를 거쳐 오면서 우리가 발견한 ‘개인’이라는 것의 핵심으로는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사회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개인에 관해 매우 다채롭게 정의를 합니다만, 제가 정의하는 식으로 보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실존’이에요. 사회에 나와서는 ‘빼어난 속물’로서 가면 놀이를 하다가도, 집이나 내 공간으로 돌아오거나 개신교 신자들이라면 교회에 가서 하느님을 대면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순간에는 가면을 벗죠. 그러면서 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그것을 근대에서는 실존이라고 부르죠. 과거에는 실존이라는 것을 철학자들, 아니면 수양하는 사람들만 가지고 있었다면, 근대사회에서 우리가 모두 개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실존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거든요.

이 실존적 존재가 된다는 것의 핵심 중 하나는 ‘내가 나의 고독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이 첫째, ‘내가 고독할 수 있는 시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저소득층이나 소수자, 이런 사람들은 나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공간을 박탈당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존적이 될 수가 없죠. 이것은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둘째, 개인이 개체로서 고독을 감수하고, 고독을 견뎌내고, 그 고독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예가 필요해요. 그런데 포스트모던 사회로 넘어가면서 소비가 이 부분을 대체해 버리거든요. 이게 소비로 대체가 되면서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 어떤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저는 천주교 배경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개신교의 가장 큰 혁명이라고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를 교회의 일원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키르케고르 식으로 말하자면 ‘신 앞에 선 단독자’의 모습으로 본 거예요. 나는 신을 대면하는 사람이고, 나 홀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존적으로 될 수밖에 없거든요. 이것을 ‘고독’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고독을 견뎌내는 힘, 이걸 통해서 신이든 아니면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어떤 힘, 이걸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게 개인, 이렇게 볼 수가 있죠.

한국 사람들은 말을 만드는 것, 조어 능력은 전 세계에서 제일 뛰어난 것 같아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을 대체해 버린 게 ‘관종’이에요. 개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관심사에서 사라지는 것’이든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나는 전시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러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아야만 존재하는 것처럼 되었죠. 그러면서 이 고독, 홀로 있을 수 있는 것을 견뎌낼 기회도, 힘도 상실해 버리는 것이죠.

이렇게 개인이 이 힘을 상실해 버리면 이 개인은 사회를 도모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우리가 사회를 도모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홀로 있기 위해서’예요. 내가 나의 실존적 공간을 보장받고, 내가 나와 또는 신과 화해하는 게 가능할 수 있는, 모두에게 그게 가능할 수 있는 사회를 도모해야 하거든요. 왜냐면 나 홀로 그것을 하기 불가능하니까요.

이런 식으로 본다면, 우리는 모두 개인이 되기 위해서 사회를 도모하는 것이고, 모든 개체가 개인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공동체를 우리가 사회라고 부를 수 있어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긴 합니다만, 한국은 개인과 사회를 너무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걸로 이해를 하는 거죠. 희생적이지 않으면 ‘넌 너무 이기적이야.너무 이기적이야’ ‘개인주의적이야’라고 이야기하고, 개인이 강조되면 마치 공동체가 안 만들어지는 것처럼, 그런데 또 공동체 안에 있으면 개인이 될 수가 없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사실은 그게 아니죠. 이 두 개는 두 개의 기둥이에요.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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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기 위해 배워야 할 것

이 주제로 10주간의 강좌를 진행하게 됩니다. 어떤 흐름으로 이끌어 가실 것인지를 간략하게 소개해주시지요.

앞부분에서는 ‘개인’이라는 것이 시공간적으로 서구에서 발현되고 발명된 것이기 때문에 서구의 사회학, 서구의 철학에서 개인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무엇으로 이해가 되었는가에 관해 살펴볼 것이고요.

중반 이후에는 그 개인이 한편으로는 내면세계를 가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빼어난 속물’이 되어야 하는, 이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고, 역량을 가져야 하는데 소비자본주의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우리가 어떻게 빼어나지도 않고, 속물 내지는 동물이 되어 가는지를 다룹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한국 사회 이야기를 조금 많이 할 것이고요.

마지막에는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기예가 필요한가’에 관해 이야기하며 ‘사라지는 기술’이라든가 ‘나를 만지지 말라’ 등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근대적 의미이건 근대 이상의 의미이건 다시 그 실존을 감당할 수 있는 기예를 가진 존재가 될 것인가 살펴볼 예정입니다.

/인터뷰 : 양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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