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교회를 떠나는 그리스도인

2013년 4월 25일 목회사회연구소에서 주관한 <가나안성도 세미나>에 참석했다. <가나안성도 세미나>는 가나안성도 316명을 설문조사하고 18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분위기가 상당히 뜨거웠다. 영미권에서는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 또는 ‘교회 없는 기독인(unchurched Christian)’이라 부르며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가나안성도’라는 용어가 아직 낯선 만큼 ‘가나안성도’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각자의 입장 정리가 아직 덜 된 느낌이다. 앞으로 ‘가나안성도’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하다. 이 글은 세미나 참석 후 크로스로(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7)에 기고한 글을 발전시켜 SFC 큐티지 <날마다 주님과> 2014년 9-10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떠나다

“수경아, 나 얼마 전부터 교회 안다니고 있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고백이다. 제법 규모있는 교회를 다니며 중등부 교사, 소그룹 리더를 활발하게 하던 친구였다. 빡빡한 프로그램과 피상적 관계에 점점 소진되는데 정작 교회에서는 신앙적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기에 차라리 교회를 끊고 홀로 신앙 생활을 하기로 했단다. 교회에 분쟁이 발생하여 고민하던 K형제는 주일이면 싸움터로 변하는 교회를 탈출했다. 일정 기간 교회를 정하지 않고 ‘순례’를 하며 공부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C집사는 주일 오전이면 동네 커피숍에서 홀로 예배를 드린다. 말씀을 묵상한 후 노트에 기록하고, 기도하는 것이 그의 예배다. 예배 후에는 인터넷으로 다양한 강좌나 설교 동영상을 본다. 고백하자면, 나도 2010년 지옥같은 교회 분쟁을 겪다가 비자발적+자발적 동기로 20년 동안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 한동안 교회를 순례하다가 현재는 C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상태로 예배만 드리는데 (아직까지는) 제도권 교회 등록 교인이 될 계획이 없다.

영미권에서는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 또는 ‘교회 없는 그리스도인(unchurched Christian)으로, 한국에서는 ‘가나안 성도’로 분류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약 1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기독교인의 신앙생활 및 의식 조사>, 2013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제도권 교회를 떠나는 저항적 그리스도인,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하는 비교회적 그리스도인,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신앙적 기반을 교회 공동체에 두지 않는 심정적 가나안 성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가나안 성도가 부쩍 많아졌음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 교회 안과 밖에 존재하는 가나안 성도는 이제 ‘현상’이 된 것이다.

 

방황인가, 저항인가

‘가나안 성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탈 혹은 방황으로 인식하느냐, 새로운 흐름 혹은 저항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담론의 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 보다는 다양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가나안 성도에 대한 인식은 묘하게 어긋나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곧 가나안 성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혹은 오해) – 선한 안타까움 – 쉬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면, 앞 서 언급한 K형제의 경우 비록 분쟁 중인 교회 상황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게 되었으나, 교회 순례를 통해 신앙의 폭이 더 넓어졌다고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를 보는 교회 청년들의 시선은 달랐다. 그들에게 K형제는 ‘방황하는 청년’이었으므로 공동체의 권면과 중보기도가 필요한 영혼에 불과했다. 이런 일련의 어긋남이 교회와 가나안 성도 사이에 벌어지는 존재론적 갈등일 것이다. 교회는 가나안 성도를 ‘지금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돌아올 영혼’ 즉 ‘집 나간 자식’으로 규정하고, 가나안 성도는 ‘꼭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나요?’ 등 낮선 질문을 던지는 ‘신앙의 순례자’ 혹은 제도 교회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 거룩한 착각은 곧 ‘동상이몽’ 대안으로 이어진다. 백 번 양보하여 가나안 성도를 ‘집 나간 자식’이라 생각하자. 자식이 집을 나간 이유가 뭘까? 권위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 자꾸 당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어머니, 어느새 영혼없는 대화만 나누게 된 형제들로 구성된 ‘무늬만 가족’ 구조에서 탈출한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집을 나간 이유’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지 않고 집수리 하고, 맛있는 음식 잔뜩 차려놓고 ‘이제 돌아와’라고 말한다면, 그리하여 집 나간 자식이 돌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해피엔딩일까? 그 해피엔딩은 누구를 위한 해피엔딩일까? 가나안 현상을 이해하고자 접근할 때 교회의,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접근부터 시도한다면 가나안 담론은 그야말로 안드로메다로 흘러갈 것이다. 가나안 성도는 이탈이나 방황의 징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복음을 상실한 교회, 세속화된 욕망과 맘몬이 상식이 된 교회, 온갖 비리와 추문이 일상이 된 교회 등 그리스도인을 ‘밀쳐내는’ 원인에 대한 질문, 신앙과 교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존재한다.

 

가나안에 대처하는 교회의 자세

이 글에서 가나안 현상의 원인과 유형과 대안을 길고 깊게 이야기하기는 부족하다(이 주제에 대해 청어람 양희송 대표가 지은 책이 발간될 예정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가나안 현상에 대처하는 교회적 관점에 대한 것이다. 앞 서 언급했듯 가나안 현상에 대해 교회는 아직 당황하고 있고 가능하다면 직면을 유예하고 싶은 주제다. 하지만 가나안 현상은 이미 담을 넘었고, 문을 열어 재꼈다. 한국교회는 이제 ‘가나안’이라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모범 답안은 없다. 정직하게 풀어야 한다. 그 문제를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첫째, 가나안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라는 질문이다. 모든 문제는 원인을 알아야 풀 수 있다. 가나안 성도 중 어떤 이들은 교회의 짐작대로 ‘단순 이탈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한 회의와 환멸, 신앙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끌어안고 고민하다가 ‘본토 친척 아비 집’ 교회를 떠나 광야를 자처한 순례자들이다. 교회가 이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제대로 던질 수 있다면 이들은 교회를 성숙케 하는 거름이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목회사회연구원’에서 2013년에 가나안 성도 3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하고, 18명을 심층 인터뷰하여 발표한 <소속없는 신앙인 조사 결과 보고서>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둘째, 그동안 우리가 고민없이 수용한 ‘신앙=교회’의 틀을 극복하자. 제도로서의 교회 중심의 신앙으로 무장된 ‘교회적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가나안 성도’의 그것보다 낫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다니다’와 ‘신앙하다’를 건강하게 분리하여 ‘교회밖 주체적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일 필요가 있다. 셋째, 질문을 허하고, 고민을 시작하라. ‘머리 크고 교만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가나안 성도를 규정하는 대표적 표현이다. 그런 표현은 오히려 한국교회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 아닐까? 성찰 없이 반복되는 교회의 구조적 모순, 수준 낮은 설교, 때로는 몰상식하거나 폭력적이기까지 한 교회 내 수많은 관계들에 문제제기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머리 크기 작거나 적당한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는 바람직한 공동체인가? 예를 들어, 교회에서 치명적 문제들이 발생하여 절망할 때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고 교회 다녀야지’라는 교과서적 대답을 듣고 ‘그렇게 수많은 문제들을 대충 얼버무리고 하나님을 보고 교회 다녀야 한다면 우리는 왜 굳이 상처받으며 교회를 다녀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꾹 삼켜야 하는 순간이 반복될 때 교회와 가나안 성도들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는 것 아닐까? 질문은 점점 많아지는데, 답을 내줄 수 없는 사유의 빈곤함이 가나안 성도를 더욱 힘차게 교회 바깥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감히 예측하자면, 가나안 성도는 현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이다. 가나안 현상은 교회의 ‘거울’이기도 하다. 비단 그리스도인들에게 뿐 아니라 세상이라는 거울에 비친 교회도 온전하지 못하다. 가나안 현상은 결국 교회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며,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고 무엇을 잃어버리며 교회를 지속시키고 있는지 성찰을 촉구하는 항의이다. 다른 맥락으로 언급되었지만 ‘가나안=안나가’의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함석헌 선생이다. 한국 교회를 향한 함석헌 선생의 일갈을 되새겨 본다. 한국 교회를 향한 1971년의 탄식이 2014년에도 적용되는 현실은 ‘가나안 현상’의 의미와 그 맥락이 다르지 않다.

“황금이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질서, 제도, 권력의 심볼이다. 한국 가톨릭 2백년, 개신교 백년 역사에 한 가지 환한 사실은 올 때는 밑층 사회로 불쌍한 민중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지금은 중류계급의 종교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중류에는 중류의식(中流意識)이 있다. 언젠지 모르게 현상 유지를 원하는 기풍이 교회 안을 채워버렸고, 그러니 가나안의 소망이 ‘안나가’의 현상유지로 타락해 버렸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러지면 ‘안나가’가 되지 않나? 오늘 한국교회에 특징을 말한다면 ‘안나가’는 부대다. 그들은 사회악과 겨루는 역사의 싸움에서 뒤를 빼고 금송아지 앞에서 절을 하고 둘러 앉아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예배하고 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발가락인 아래층 사회가 교회에서 빠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내쫓긴 것이다.” -함석헌, <한국기독교 무엇을 하려는가>, <<씨알의 소리>> 1971년 8월호



오수경
오수경

청어람ARMC 편집장. 나이 먹다 체한 30대, 비혼, 여성이며 페북 잉여로 살아가고 있다.

  • 웬디

    매우 동의 합니다 제일 답답한건 목회자들이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걸 알면서도 평신도는 제쳐두고 목회자들끼리 모여서만 소통한다는것이죠지금 제가 제일궁금한것은 꼭 자기교회만 다녀야 하는 폐쇄성입니다. 목회자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평신도들은 얼마든지 타교회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할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교회의 텃새와 이질감,배척주의로 인해 교회를가도 불편한건 참으로 안타까운일입니다

  • 웬디

    매우 동의 합니다 제일 답답한건 목회자들이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걸 알면서도 평신도는 제쳐두고 목회자들끼리 모여서만 소통한다는것이죠지금 제가 제일궁금한것은 꼭 자기교회만 다녀야 하는 폐쇄성입니다. 목회자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평신도들은 얼마든지 타교회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할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교회의 텃새와 이질감,배척주의로 인해 교회를가도 불편한건 참으로 안타까운일입니다

  • Sonia

    씁쓸하지만 허를 찌르는 글이에요.!
    제가 근 1년 반동안 고민하고있었고, 또 하고싶었던 이야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