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나루토’는 왜 망작(亡作)이 되었을까? – ‘도그마’가 되어버린 기독교 현실을 돌아보다

[허영진의 명랑 독서] ① <나루토>는 왜 망작(亡作)이 되었을까?  – ‘도그마’가 되어버린 기독교 현실을 돌아보다
<나루토> 1-72권, 기시모토 마사시 지음, 대원씨아이 펴냄 (현재 국내에는 70권까지 출간)

서점 직원이자 '윤하 아빠'인 허영진이 '발칙하고 명랑하게' 쓰는 책 그리고 세상 이야기.

주의 : <나루토> 완결을 맞이하여 ‘정주행’을 계획하신 분들이라면 심각한 수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4년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벌어졌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표현이 한 없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쓰는 글의 주제가 ‘책’이니 만큼 2014년 출판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먼저 생각해 봤다. 작년 한해, 출판계에서 일어났던 사건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을 하나 꼽자면 일본만화 <나루토>의 완결 소식 아니겠나 싶다(<나루토>는 2015년 2월, 총 72권으로 완결될 예정이다).

나루토

닌자들의 세계, 상처입은 치유자 ‘나루토’ 이야기

<나루토>는 닌자들의 세계가 등장하는 액션 활극이자 소년 만화다. 책의 이름이기도 한 ‘나루토’는 ‘나뭇잎 마을(마을이라고 해서 열 몇 명이 사는 진짜 마을이 아니라 거대한 국가의 개념이다)’에서 사는 주인공 소년 닌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주간지 중 하나인 슈에이사의 주간 <소년 점프> 43호(1999년)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2014년 기나긴 연재를 완결 지었다. 꼬박 15년에 걸친 연재였으며 단행본으로 따지면 72권이다. 단행본의 일본 내 판매부수는 1억 부를 훨씬 웃돌고 전 세계에서 판매된 부수를 합치면 2억 부를 상회한다. 같은 잡지의 라이벌 격 작품인 <원피스>보다 일본 내 인기는 낮고 전 세계적 인기는 더욱 높다.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포함한 애니메이션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나루토>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등장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대전형 액션 게임인 <나루티밋> 시리즈 역시 대히트했다. 21세기 들어서 일본 만화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연재작으로 손꼽히는 <블리치>, <원피스>와 더불어 빅3(혹자들은 장기 연재로 스토리가 산을 타버린 <블리치>를 빼고 <헌터 X 헌터>를 넣기도 한다)에 속한다. 빅3 중에서도 원소스 멀티유즈로만 따지자면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뭐,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정량적인 평가다.

정성적 측면에서도 <나루토>의 스토리와 주제 의식 역시 큰 호평을 받.았.었.다(과거완료임을 기억하자). 특히 닌자 세계를 조직화된 폭력으로 전복시키려는 ‘아카츠키(붉은 깃발)’라는 비밀 닌자 테러 조직의 수장인 ‘페인’과의 일전을 그린 단행본 48권까지의 엄청난 이야기 전개는 그야 말로 박력이란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나루토>는 소년 점프의 슬로건이자, 대개 소년 만화의 주제인 ‘우정, 노력, 승리’의 세 키워드를 충실하게 따른다. 게다가 이를 발전시켜 더욱 심화된 주제 의식을 보여 주었다. 엔하위키미러에서 ‘나루토’의 주제 항목을 보면 “타인의 사회적,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고 진정한 사랑을 통해 사회를 바꾸는 과정”이라고 게재되어 있다(이것이 일본 소년 만화의 수준이다?!?).

만화 전반에는 ‘닌자들의 세계’라는 설정 자체가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폭력이 드리워 있다. 필연적으로 ‘복수가 복수’를 낳는 구조다. 나루토는 이 세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증오의 연쇄’를 ‘청산’하려 애쓴다. 그 무엇도 아닌 ‘공감’과 ‘사랑’으로 말이다. 나루토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나루토가 외롭고 슬픈 사람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온 박상규 작가의 동화 <똥만이>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똥만이’를 ‘나루토’로 대체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말이다. 오마이뉴스 에 실린 <똥만이> 서평

똥만이(나루토)는 외롭고 슬퍼서 좋은 사람이 되겠다. 슬픔이 있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가엽게 여길 줄 알 거든.

주인공인 나루토는 고아에다 왕따, 나뭇잎 마을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호의와 선의를 베푸는 좋은 어른과 실력 있는 스승을 만난다.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동료들과의 상호작용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자신의 고독, 고통, 소외감을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공감으로 승화시키면서 말이다. 이렇게 보면 나루토의 주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 중 두 번째 계명에 대한 일종의 심리학적 주석처럼 보일 정도다.

한마디로 나루토는 ‘상처 입은 치유자’다. 지독한 왜색풍의 배경과 설정 속에 가려 있으나 나루토라는 주인공 캐릭터 설정이나 이 만화의 주제 의식 자체는 대단히 기독교적 색채가 녹아 있다.

나루토-페인-6도

나루토 ‘페인’ 6도. 출처 : 엔하위키미러 ‘나루토’

<나루토>의 ‘페인’편에 등장하는 인물, 페인은 전쟁가운데 친구를 잃은 경험으로 인해 닌자 세계가 품은 증오의 연쇄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다. 나루토는 증오의 현현인 이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와 ‘실’전이 아니라 ‘설’전을 벌여 설복시킨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루토는 닌자 세계에 평화와 사랑으로 구원을 불러일으킬 메시아로 그려진다. 그것도 폭력적 방법으로 구원을 불러 올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비폭력과 희생, 타인의 이해를 기반으로 한 메시아를 상징한다. 만화 전반에는 이처럼 유사 기독교적 설정이 잔뜩 깔려 있다.

너는 내게 -<나루토> 1기 엔딩 테마

등을 돌린 아이들 / 그들만의 비웃음
빛을 잃은 날개는 / 혼자만의 꿈을 꾸었어
넌 불안해 보였어 / 넌 위험해 보였어
넌 외면해 버렸어 / 널 이해 할 수 없어
그런 내가 너를 의지하는 걸 / 어느 새 너를 닮아가고 있는 걸
소중한 마음 지켜 낼 수 있는 걸 / 한 번도 포기 하지 않는 너 때문이란 걸
그런 너의 뒷모습을 보면서 / 너무나 커져버린 너를 보면서
내리는 비에 힘껏 다짐하는 걸 / 세상이 끝이라고 해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

국내에서 방영한 <나루토> 1기의 엔딩 테마의 가사다. 함춘호(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함춘호)가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이 곡을 돌려 들으며 몇 번이고 홀로 눈물을 삼켰다. 나루토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내게는 이 가사가 예수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CCM 아티스트 마이클 카드의 <God’s own fool>의 가사에는 “분노한 젊은이의 모습을 한 하나님을 사람들은 거룩자로 볼 수 없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노래와 비슷한 맥락이지 싶다.

<나루토>는 어쩌다 망작(亡作)이 되었나

복음서가 그리는 예수는 늘 안정적이라기보다 불안해 보인다(그의 제자들 또한 예수를 불안해했다). 그는 체제를 위협하는 인물로 낙인 찍혀 있었다. 결국 예수는 사회, 정치, 종교 체제에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조차 이해 받지 못했다. 예수의 끔찍하고 남루한 최후를 지켰던 이들은 오직 예수와 정서적으로 깊이 공감하던 아낙네들뿐이었다.

기독교 역사는 버림받고 외면당했던 예수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그를 따라 ‘작은 예수’가 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다가 예수처럼 고통스럽게 죽거나 혹은 더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위에 언급한 가사를 인용하여 표현하자면) “소중한 마음 지켜낼 수 있는 걸 (중략) 너무나 커져버린 너를 보면서 (중략) 세상 끝이라고 해도” 예수와 “함께 가고 싶”었던 사람들이 순교와 헌신으로 기독교의 참 역사를 일구어 내었다. <나루토>의 국내 판 첫 엔딩의 가사는 한 마디로 복음서의 요약판인 셈이다.

그렇다고 <나루토>가 명작(名作)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나루토는 ‘결과적으로 망작(亡作)’ 대열에 서고 말았다. 수많은 <소년 점프>의 장기 연재 인기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상업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만화 잡지 에디터와 자신이 창작한 세계관을 확장하고 싶은 작가가 짬짜미해서 전설로 남을 만한 작품들이 갑자기 지구가 아니라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연재를 옮기는 듯 할 때가 있다. 나루토 역시 그랬다.

‘나루토가 전설의 명작에서 전설의 망작’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된 이유는 바로 나루토가 갑자기 신화적 존재로 탈바꿈하면서부터다. 1부에서 작가는 따돌림 당하는 주변부 아이가 조금씩 성장하면서 중심부가 지닌 지배 논리나 질서까지 전복시키는 모습을 그렸다. 원래 스토리 초기부터 나루토의 출생과 존재에 대한 밑밥을 깔아 놓기는 했으나 ‘페인’편 이후의 나루토는 딱 잘라 말해 ‘신의 아들’로 그려진다.

이게 무슨 차이냐 하면, ‘신의 아들’로서 나루토는 자신이 느꼈던 슬픔과 아픔을 공감으로 승화시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랬던 것이다(또는 그랬던 운명이었다. 본질상 그는 ‘신의 아들’이었으니까. 신의 아들). 나루토가 ‘아수라의 환생’이라는 설정으로 스토리를 풀어 버리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간 나루토의 주변에서 나루토를 돕고 함께 호흡하고 그를 성장시키려고 목숨을 걸고 등장했던 인간미 넘치던 무수한 조연 캐릭터들이 전부 주변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의 아들로서 나루토’의 설정이 득세하자 싸움의 영역이 일상 전투영역을 초월하게 되었다. 이야기가 선(仙)계와 신(神)계가 왔다 갔다 하는 통에 인술이니 인법이니 하는 평범한 닌자의 기술이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손가락 질 한번이면 대륙이 날아가는 지경이니 말이다.

그간 나를 포함해 수많은 독자들이 <나루토>를 좋아했던 까닭은 나루토를 포함한 수많은 입체적인 캐릭터, 진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캐릭터들의 매력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가 갑자기 신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그간 나루토의 가장 매력적인 면을 지탱하던 두 개의 축, 주제 의식과 매력적인 캐릭터의 개연성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나루토가 사랑과 공감의 화신이 되어 버린 순간, 사랑과 공감, 타인에 대한 이해가 모두 도그마(dogma)화 되었다. ‘사랑해야 하니까 사랑한다’는 말, 이 보다 맥 빠지는 말이 또 있을까.

개신교가 ‘망작(亡作)’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개신교)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의 기이한 행적과 사랑의 이야기들, 그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들이 단지 도그마화 되면서 개신교는 ‘사랑해야 하니까 사랑하게 되는, 순종해야 하니까 순종하게 되는, 하나님의 뜻이니까 따라야 하는 종교’로 전락했다. 개신교 역시 <나루토>처럼 ‘명작에서 망작’의 길로 향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도그마화 되어 사람들이 더 이상 공감을 하지 못하고, 여태까지 본 게 아까워 욕하면서 보게 되는 상태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개신교계에서 복음을 신화화하거나 혹은 미신화(迷信化)하지 않으려면 ‘인간 예수’를 부각 시키는 것이 주요한 쟁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복음주의적 회심에는 인격적 설복이라는 요소가 핵심 요소가 아닌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한국 교회에서 ‘역사적 예수’나 ‘인간 예수’ 등의 말이 나오면, ‘자유주의’나 ‘빨갱이’ 소리를 듣는 판국이다. 지형이 오른쪽으로 지나치게 클릭하면 좌편향해서라도 지축을 돌려야 한다. 대한민국의 신앙 지형에서는 의도적으로라도 ‘신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행적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묵상이 필요하지 않나 늘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 교리는 예수를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으로 이야기한다. 예수의 말이 도그마가 되는 순간, 인간 예수의 설 자리는 사라진다. 예수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우리는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날 길이 없다. 인간 예수는 우리를 감화시키고 설득하고 공감하고 자신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하지만 도그마화된 예수는 강요하고 지적하고 하달하며 무엇보다 이야기를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문창극망언

2014년 총리 후보자였던 문창극 후보자가 “식민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언한 내용이 사회적 논란으로 번졌고, 문창극 후보는 결국 낙마했다. 이외에도 ‘세월호’와 관련하여 개신교 목회자들의 ‘망언’이 사회적 질타를 받았다.

비근한 예를 들어 보자. 세월호 참사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한 수많은 설교가 있었다. 위로한다며, 딴에는 성경적 해석이라고 한 말이겠지만 위로는커녕 상처만 후벼 팠다. 이해는커녕 신정론의 측면에서 의혹과 의문만 잔뜩 늘었다. 도그마가 지닌 문제는 늘 그렇다.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사안에 대해 떠들어 대고 매번 경직되고 정형화된 행동을 취하게 한다. 도그마의 언행 체계는 그렇게 사람들을 물어뜯고 할퀴고 상처 입힌다.

예수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말만 하고 미리 짜인 행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비유는 언제나 생경하고 신선했다. 그의 행동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어서 그 행동에 담긴 함의를 누구나 의아해 했다.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천역덕스럽게 선을 행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음을, 아니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장 먼저 보여 주었다.

전설의 문전에서 <나루토>는 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망작이 되었을까? 한 번에 라멘 곱배기를 몇 그릇씩 해치우던 먹보 나루토가 난데없이 성인군자가 되자 이야기의 매력이 곤두박질쳤다. ‘먹보요 술꾼’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그 이유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허영진
허영진

대형 서점에 근무하지만 종이책을 팔지는 않는다. 오순절에서 자라 고신에 자리 잡았고, 실존적으로는 '가나안 성도'에 더 가깝다. 눈물 쏙 빼는 간증서를 하나 써 보고 싶은 소원이 있어 개신교 출판계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지금은 '갸웃'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