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람 매거진

헌신페이! 교회는 다를까?

[삐딱황의 바른생활]  ② 헌신페이! 교회는 다를까?

 '황구라'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그가 '삐딱'하게 돌아와 '바른' 이야기를 한다. 국/내외에서 이슈가 되는 사건이나, 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들을 '삐닥황'만의 시선으로 관찰-해석-적용할 예정이다.

지난 글에서 선교 단체 간사들의 초저임금 노동, 즉 ‘헌신페이’에 대해 소개했다. [지난 글 보기] 후배 간사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반겨주었고, 선배 간사들은 대개 침묵했다. 예상했던 결과다. 후배들 입장에서는 시원했을 것이고, 선배들 입장에서는 불편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노파심이지만 지금까지 현장을 지키며 후배들의 더 나은 사역환경을 위해 노력했던 선배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방향으로 읽히지는 않았으면 한다. 냉소와 불만을 넘어서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몸부림이라 봐주시면 좋겠다. ‘헌신페이-캠퍼스 선교단체’ 편을 쓰면서 글에 대한 반응을 보고 후속편의 운명을 결정하겠노라 선언했다. 주관적인 평가지만 반응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미지근했다. 결과는 성경적이지 못했지만 이왕 첫 삽을 떴으니 교회 편까지는 가보자.

한국교회 교육전도사들의 현실

‘헌신페이’는 ‘열정페이’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열정페이의 사전적 의미를 조금 더 파고들면 단순한 초저임금 노동이라기보다는, 도제식 산업에서 벌어지는 경력과 저임금의 맞교환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유명 디자이너들이 ‘너는 나한테 디자인을 배우니까 월급은 기대하지 마’ 라고 말하는 논리와 같다. 저명한 선배 밑에서 단계를 밟으며 자기의 브랜드를 런칭하는 날까지 열정을 밑천 삼아 버티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헌신페이는 캠퍼스 선교단체 간사보다 교회 사역자들에게 두드러진 현상이다. 캠퍼스 선교단체 간사는 버티고 버텨도 자기 브랜드를 런칭 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애초에 브랜드를 런칭을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그러나 교회 사역자들은 얘기가 다르다. 대부분의 교회 사역자들은 브랜드 런칭(담임 목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사역을 시작한다. 담임 목회에 대한 꿈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주도적으로 사역 하고 싶은 마음은 어떤 사역자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상봉 디자인실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열정페이 현상이 기독교적으로 상황화되어 교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1).

교회 사역자들의 서열은 일반적으로 담임 목사, 부목사, 전임전도사, 교육전도사로 분류된다. 헌신페이 문제는 담임 목사를 제외한 나머지 3단계의 부교역자들에게 공히 적용된다. 그중에서도 교회 사역자 계급내의 수드라2)로 평가받는 교육전도사들이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다. 그래서 이 글은 교육전도사들의 헌신페이에 집중해서 논지를 전개하려 한다. 교육전도사들은 일반적으로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주말에 사역을 하는 분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학기마다 300만 원 정도의 등록금을 내며 학교를 다닌다. 거기에 최소한의 생활비, 기숙사비와 도서 구입비를 합해 월별 70만원으로 가정하면 1년 필요 경비가 1,440만원이라는 계산이 선다. 교회나 교단 같은 외부에서 학비 지원과 함께 매월 70만원을 지급해야 겨우 빚 지지 않고 학업을 마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이다. 현재 일부 중/대형 교회에서만 그런 수준의 지원을 해준다. 결국 복지 혜택이 좋은 교회로 교육전도사들은 몰리고, 그런 지원을 해줄 수 없는 소형 교회들은 교육 전도사를 구하기 힘들다. 누군가는 믿음 없는 전도사들이라고 욕하겠지만 당장 대출이 쌓여가는 현실에서 손가락질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에 만난 한 전도사는 3년 내내 개척 교회에서 무급으로 사역한 사람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거룩한 ‘몸빵’을 한 셈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데이트 비용은 고스란히 여자 친구의 몫이었다. 이는 결코 그 전도사의 잘못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이상봉 디자인실에서 연봉(월급이 아니라 연봉) 120만원 받는 인턴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다만 비현실적인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회와 ‘갑’들에게 항의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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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들은 3년의 시간만이라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졸업 이후에 교회 현장에서 천 페이지짜리 목침하기 좋은 두께의 책을 다시 펴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단순히 고생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목회에 필수적인 학습 시간을 빼앗긴 상태에서, 최소한의 무기 없이 전쟁터로 보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헌신인가, 착취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사실 교육전도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교육전도사라는 직책은 교단 헌법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 교육전도사지 사실은 가르치기보다 배워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신학 교육이 꼭 강의실과 도서관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신대원에서는 교회 전도사 사역을 필수과정으로 설계해 놓았다. 그러나 성경과 기타 신학서적들은 일차적으로 텍스트이다.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천착하는 시간들을 보내지 않고 교회 사역의 경험만 쌓는 현실은 곧 부실한 교회론과 빈약한 설교로 이어지게 된다. 교회에 사역자가 필요하면 전임 전도사나 목사를 선발해야한다. 디자이너 이상봉이 인턴으로 정규직 수준의 노동력을 확보하듯, 교회는 전임이 할 일을 파트타임 교육 전도사들에게 맡긴다. 사실 신학생들은 3년의 시간만이라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졸업 이후에 교회 현장에서 천 페이지짜리 목침하기 좋은 두께의 책을 다시 펴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단순히 고생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목회에 필수적인 학습 시간을 빼앗긴 상태에서, 최소한의 무기 없이 전쟁터로 보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캠퍼스 현장에 10년 넘게 ‘신학대학원에 가지 않은 간사’로 존재했다. ‘신대원 가라’는 얘기를 백만 스물 세 번쯤 들었다. 한번은 모교회 담임 목사가 어머니께 나를 교회 전도사로 임명하고 싶다는 제안 했다. 그분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나를 배려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 때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내게 말하셨다. “선관아. 나는 내 귀한 아들이 교회에서 전도사 종처럼 사는걸 보고 싶지 않다.” ‘전도사 종’이라는 말은 내 가슴을 후볐다. 그 말은 교회에서 전도사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대우 받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권사님의 절규였다. 교육전도사들이 새벽 기도 차량 운행까지 하면서 교회를 섬기는데 매 학기 학비가 없어서 전정 긍긍하는걸 알고 계시기에 끝까지 나를 뜯어 말리셨다. 이렇듯 교회 교육전도사는 정작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교회에서 발생하는 온갖 잡일을 청소하는 인간 진공청소기 신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교회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반박하실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상대적 양호함으로 덮기에는 너무 많은 교회들에서 일상적 노동 착취가 일어난다. ‘착취’라는 은혜 떨어지는 어휘를 사용한 점 용서하시라. 그러나 ‘착취’ 외에 더 정확한 표현을 찾기 어려운 교회 현실이 우리 주변에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그런 현실을 우리의 전도사 들이 힘겹게 떠받치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앞에서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뽑지 말고, 전임 위주로 사역해야한다고 제안했었다. 그럼 ‘신학생들은 뭐 먹고 사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교단이 각 교단에서 책임 질수 있는 목회 후보생만큼만 뽑고, 그들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여기서는 불가피하게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교육 전도사의 헌신페이 문제는 목회자의 과잉배출 문제와 바로 맞닿아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비인가를 포함해서 신학교가 200개가량 된다. 매년 7,000명의 목사들이 배출된다. [관련 링크 : ‘한국 개신교 신학대학의 현황과 실태’, 정재영, 목회사회연구소] 이런 추세로 2020년을 맞이하면 목사 200,000명 시대가 되고, 목사:교인 비율이 1:10까지 이르게 된다3). 현재도 심각한 무임 목사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게 된다. 너무 앞서서 걱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대한민국 교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결국 교단별로 목회 후보생들의 숫자를 스스로 줄이지 않으면 교육 전도사들의 헌신페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개선되기는 어렵다. 사실 지금 하는 얘기는 전혀 새롭지도 않고, 많은 이들이 이미 인식하는 문제일 것이다. 문제는 신학교의 운영을 학생의 등록금에 거의 의존하는 현실에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겠냐는 것이다. 불가능해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소속돼 있는 캐나다 신학교(Trinity Western University, ACTS Seminary)에서는 교단의 목회 후보생 숫자가 철저히 관리된다. 독립 운동하는 마음으로 도시락 폭탄을 던지다 보면 광복의 시점은 올 것이다. 오래 걸리겠지만 결코 불가능한 영역은 아니라는 얘기다.

교육전도사는 사역자 계급의 꼬리칸 탑승자가 아니다

이쯤에서 내 얘기를 살짝 해보자. 내 첫 번째 정체성은 죠이선교회 간사지만, 현재 밴쿠버에 있는 한인교회의 전도사이기도하다. 올해 1월부로 전도사 대열에 합류했다. 십년 넘게 간사라는 호칭에 익숙한지라, ‘전도사님’이라고 누군가 부르면 다른 전도사를 쳐다보다 뒤늦게 깨닫는다. ‘맞다. 나도 전도사였지!’

나는 전도사지만 교회에서 맡은 역할은 (한국과는 다르게) 매우 구체적이며 협소하다. 주보 편집이다. 넉넉잡아도 일주일에 두 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이외에 나에게만 요구되는 업무는 없다.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하는 의자 정리 정도가 추가되는 일이다. 나는 일요일에 정확히 오전 10시에 교회에 도착해서 오후 3시에 떠난다. 10시에 도착하자마자 주보 출력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점심 먹고, 오후 성경 공부에 한 시간 참여한 후 집으로 돌아온다. 교회는 그런 나에게 매월 600불의 장학금을 준다. 사례비가 아니고 장학금이다. 교회는 나를 사역자로 부려먹지 않고, 철저히 교회 성도 중의 한명으로 받아들인다. 교회가 작아도 할 일은 적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내가 전도사지만 큰 부담 없이 교회를 다닐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사역을 철저히 성도들과 분담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 구조에서는 사례비를 받는 사역자는 기독교 포털 서비스를 제공하고, 헌금을 내는 성도는 서비스의 유저가 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전임 사역자들이 일주일에 80시간씩 일할 수밖에 없다.

반면 우리 교회는 아주 세밀한 것까지 성도 한명 한명이 구체적으로 섬길 수 있도록 세팅되어있다. 당장 다음 주 예배 봉헌 시간에 헌금 바구니를 들고 무대 앞으로 나가는 건 4살 된 내 아들이다. ‘전도사로서 네가 받은 만큼 교회에 충성하라’는 개념으로 장학금을 주지 않는다.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에 참여하지만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일정 부분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이다. 큰 차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론 차원의 혁신이 없이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물론 교회 갈 때는 학교 갈 때처럼 가죽 재킷 걸치고, 선글라스 쓰고 가지는 않는다. 순간순간 장로, 권사님들의 표정을 본능적으로 살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교회 성도들은 나를 하대하거나, 언제든 명령 내릴 수 있는 ‘군대 후임’처럼 대하지 않는다. 나는 전도사지만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는 사역자 계급의 꼬리칸 탑승자가 아니다.

설국열차꼬리칸

‘전도사로서 네가 받은 만큼 교회에 충성하라’는 개념으로 장학금을 주지 않는다.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에 참여하지만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일정 부분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이다. 교회 성도들은 나를 하대하거나, 언제든 명령 내릴 수 있는 ‘군대 후임’처럼 대하지 않는다. 나는 전도사지만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는 사역자 계급의 꼬리칸 탑승자가 아니다. 영화 <설국열차> 꼬리칸 풍경. 이 글 내용과는 무관(?)하다.

교육전도사들의 헌신페이 문제는 재정적인 개선과 함께 그들을 바라보는 계급화된 시선을 바로 잡는 것으로 이어져야한다. 내게 매월 600불의 장학금은 공부하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많이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나는 금액 이상의 은혜와 여유를 경험한다. 나머지 금액은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채운다. 교회의 장학금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교회는 나에게 시간적, 정서적 부담을 덜어주며 전임 사역자로 준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는 ‘지금’ 부터!

교회에는 다음 세대나 미래에 관한 표어들이 유독 흔하다.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 등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가슴을 벌렁벌렁 뛰게 하는 문구들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문구들이 다음 세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다음 세대에도 지금 규모 이상을 유지하고 싶습니다’로 읽힌다. 다음 세대를 책임진다면서 다음 세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인 교육전도사들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교회 내의 헌신페이 문제는 상당수 중대형 교회의 경우,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4). 담임 목사에게 지나치게 높게 배정된 예산만 살짝 덜어내면 간단히 해결되는 교회도 많다. 만약 교회의 재정이 열악하지만 전도사들의 사역이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지원하고, 시간적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최선의 대안이 아닐까 싶다. 캐나다 교회도 신학생들이 교단의 지원을 충분히 받으며 여유 있게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다만 교단부터 개별 교회, 그리고 해당 신학생이 속한 소그룹까지 십시일반하면서 돕는다. 한 명의 목회자 후보생들을 키워내기 위해 구성원 전체가 애쓰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는 사실이 부러울 따름이다. 전도사들이 거룩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 후보생이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니다. 전도사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도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얼마 전 아이를 다섯 키우는 사모님을 만났다. 반면에 우리 집은 달랑 아이 하나다. 그런데 그 사모님은 다섯 키운 내공으로 내 아내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아이 키우느라 힘드시죠? 아이 하나나 다섯이나 힘든 건 마찬가지죠 뭐.” 나와 내 아내는 순간 그분께 무릎 꿇고 싶었다.

지금의 5~60대 목회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모진 환경을 버티고, 여기까지 오셨다는 것을 후배들은 잘 알고 있다. 또한 당신들이 배곯아도 당신들의 자녀들은 배불리 먹이려 어금니 꽉 깨물고 버티신걸 잘 알고 있다. 덕분에 우리 세대는 ‘국제시장’을 경험하지 않고 오히려 비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국제 시장’을 먼저 경험 한 선배들이 아이 다섯 키운 사모님의 시선으로 ‘열정페이’ 문제를 직시하길 바란다. 교육전도사가 마음껏 공부하고, 한 사람의 목회자로 건실하게 준비되도록 교회 전체가 나설 때가 됐다. 다음 세대 목회자들을 위한 준비가 충실치 못하다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주님께 가게 될 것이다.

 

[주]

1) 아쉽게도 현재 대한민국 교회의 부교역자들이 어떤 사역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할 만한 통계를 찾을 수 없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에서 작년 12월에 설문조사를 실시했지만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기윤실의 통계가 나오면 최근 상황에 대한 구체적 데이터로 접근할 수 있겠다.

2)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4번째 계급이다. 노예계급이다.

3) 2014년 10월 22일에 장신대학원 종교개혁 특강에서 김요한 목사가 했던 강의를 참조. 강의 내용을 적용한다면 앞으로 전임 목회를 준비하는 분들은 이중직이나 자비량 목회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4) 무리한 건축으로 빚에 시달리는 교회는 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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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황의 바른생활] ① 열정페이? 헌신페이도 있다!

황선관

죠이 선교회 간사. 현재는 아내 김은형, 아들 황도하와 함께 캐나다 밴쿠버에서 신학 연수 중이다. 한 가지를 꾸준히 잘 못하는 성격인데, 간사는 성격에 비해 오래 하고 있다.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고 주장하며 ‘대충의 힘’을 설파하며 살고 있다. 두어 개의 잡지에 연재를 했었고, 책을 한 권 내려다가 출판사에 까이고 와신상담 재기를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