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람 매거진

EDM 논쟁은 무엇을 남겼나

그동안 청어람 매거진은 EDM으로 촉발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장르와 문화 문제를 비롯하여 예배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던 이유는 이것이 단지 '논란'으로 소비되지 않고, 토론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성숙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어람 매거진의 글들이 이 주제의 '모든 것'을 다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이 주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앞 선 글들에 이어 오랫동안 CCM 운동을 해왔으며 현재 미국에서 예배학 한국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이유정 목사의 글을 싣는다. 양식-문화-사역적 관점을 종합적으로 풀어냈다.

-글 보기 : [이슈 따라잡기] EDM, 이게(E) 다(D) 뭐라고(M)
-인터뷰 보기 : 진호 "나는 디제잉 예배인도자입니다"
-글 보기 : EDM 논쟁, 문화 창조를 막는 이 누구인가?
-글 보기 : 어느 음악 평론가의 '크리스천 EDM' 연대기
-글 보기 : EDM, ‘Why Not?’ 이전에 던져야 할 질문

 

-이유정 교수(리버티대 예배학 한국 디렉터)

얼마 전 IVF 전국 리더대회(IVF 전리대) 오프닝 축제 때 EDM 음악 장르를사용한 것에 대해 논란이 컸다. 모 인터넷 언론에서는 “EDM 쓰면 지옥 갑니다(?)”1)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 논쟁을 다루었고, 단숨에 인기 기사 1위에 등극했다. 최근 SNS에서 현대적인 크리스천 음악 양식에 대해 근거도 없고, 논리도 취약한 일방적인 공격성 발언을 자주 접한다. 2) 찬양 운동 30년이 지난 시점에 여전히 해묵은 음악 양식 논쟁이 뜨거운 감자가 되다니 부끄럽다. 이제 어두운 동네 뒤안길의 케케묵은 논쟁을 접고 환한 진리의 빛 앞에 드러낼 때다. 성경과 신학, 예술과 문화의 유수한 강물을 따라 수백 년 집적된 유산 속에 이미 이 같은 논쟁에 관한 넉넉한 해안이 녹아있다.

일단 최근 주최 측이 디제잉 형식을 사용한 목적이 예배가 아니라 ‘개막식의 축제 분위기를 위한 기획 의도’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대 피 끓는 젊은이들이 “캠퍼스 망명자(CAMPUS EXILES)”라는 주제로 영적, 도덕적으로 무너져가는 대학교를 살리기 위한 포부를 갖고 모였다. 대학생 복음화율 3%인 현실을 감안하고 이 상황을 보자. 전혀 다른 면이 눈에 띈다. 젊은이들이 스펙과 자기계발이 아닌, 부패한 문화를 살리기 위해 자기 시간을 내어 놓은 기특한 이들이다. 이들이 대회 첫 오프닝 무대에서 일시적으로 누린 젊음의 끼와 발산을 용납할 수 없는 기성세대라 한다면 정말이지 한국교회 미래는 숨 막힌다.

역사는반복된다

찬양 운동 30년이 지난 시점에 여전히 해묵은 음악 양식 논쟁이 뜨거운 감자가 되다니 부끄럽다.

세속적인 양식

우리 기성세대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모든 음악을 무조건 예배음악에 적합한가, 아닌가의 기준 하나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쉽게 난도질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좋지 않은 버릇이다. 이는 지난 수백 년간 교회가 저질러 온 흑백논리요, 수많은 예술인들의 가슴을피멍 들게 한 역사적 오판이다. 예배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분리한 시도는 그 의도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시행착오와 함께 교회음악을 퇴보케 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인이 누릴 수 있는 음악을 단지 예배음악만으로 제한시키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술을 너무나 왜소하게 만들고, 저 어두운 교회 지하실에 가둬버리는 중세적 행태이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수백 년 동안 예배음악에 맞지 않는 모든 형태의 음악을 정죄했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거룩하게 부르고 있는 수많은 성가 곡들이 당대에는 성스럽지 못한 세속 음악으로 낙인찍혀 연주를 금지당하거나, 작곡가들을 죄악시하는 우를 범했다.

한 예로 교회 수난절을 위해 작곡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일화를 들어보자. 당시 이 곡이 교회에 초연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어이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이 음악으로 어쩌자는 거지?” 한 귀족 부인은 “하나님이여 어린이를 보호하소서! 우리가 마치 오페라 극장에 온 듯합니다.” 이 작품은 바흐 생시 1720년 단 한 번의 연주로 끝났다. 그런데 150년 후 이 곡을 세 번이나 연거푸 듣고 나온 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했다. “기독교를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에게도 여기 이 작품은 정말 복음으로 들린다.” 월터 콜네더는 그가 바로 젊은 니체였다고 기록했다.3)

마태 수난곡이 거부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 양식이 세속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세속 오페라에서 사용하던 레치타티보, 아리아 양식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음악의 생명은 바로 이 극적인 기법에 있었다. 예수의 수난을 묘사하는데 이 양식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천재 바흐의 음악적 시도였을 뿐이다.

오늘날 최고의 전통 교회음악 악기로서 왕좌를 차지하는 파이프 오르간도 처음 교회에 들어올 때 그리스도인들은 쌍수를 들어 반대했다. 이교도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 최고의 악기를 마귀의 악기4)로 치부한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노래방이나 회식 자리에서 가요나 뽕짝 한 곡 정도는 죄의식 없이 부르면서, 왜 우리는 ‘기독교’가 붙은 음악에 대해서는 유난히 융통성 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걸까?

일반은총과 영역주권사상

이 논쟁을 풀기 위해 먼저 일반 은총과 영역 주권 사상이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교회음악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인 칼빈도 일반 은총 영역인 예술에 대해서는 의외로 관대했다.5) 칼빈은 음악이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우리의 성향과 도덕을 고양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베풀어 주신 여러 가지 은총들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이라 했다. 게다가 그는 예술이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려앉을 때라도 이러한 류의 즐거움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함으로 음악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했다. 가장 보수적인 장로교 창시자가 대중음악(?)의 가치를 인정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칼빈이 조심했던 것은 하나다. 그 즐거움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인류사회의 공통적인 유익과 잘 조화를 이루지 않을 때 그것은 정죄될 것으로 보았다. 예술로써 어리석은 기쁨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무가치한 허영심으로 사람들을 도취시킬6)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0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설립 취임 강연에서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인간 존재의 전 영역에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 땅은 한 치도 없다”고 했다.7) 1898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그가 한 칼빈주의 강의8)에 이르기까지 ‘영역주권(領域主權 · Sphere Sovereignity)’은 그의 핵심 사상이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의 대상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거룩과 세속이라는 이원론적 사고로 나누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과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대로” 만드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음악, 교육, 경제, 종교 등 각 영역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각각의 영역은 고유한 주권이 있고, 각 주권은 다른 주권을 침범할 수 없다. 각 영역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법칙이 작용하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

예를 들면 음악은 하나님께서 주권을 부여한 고유의 영역이 있다. 이를 목회적 관점으로는 분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예배라는 고유의 영역으로 모든 음악 양식과 질을 분석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예배음악 외에도 교회음악, 기독교 대중음악, 기독교적 가치와 세계관을 담은 노래를 넘어 건전가요와 연주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예술적 넉넉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지금 EDM에 대한 염려는 어떤 뿌리에 근거한 것인지 궁금하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오늘날 최고의 전통 교회음악 악기로서 왕좌를 차지하는 파이프 오르간도 처음 교회에 들어올 때 그리스도인들은 쌍수를 들어 반대했다. 이교도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 최고의 악기를 마귀의 악기4)로 치부한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문화 변혁적 사명

더 나아가 교회는 사단에게 빼앗긴 예술의 영역을 구속하여 회복시키는 일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모든 예술 장르를 포함한)을 구속시키기 위해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칼빈은 창조의 세계와 문화의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광장’이라 했다.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의 영역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주요, 창조의 하나님으로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문화의 구속주요, 문화의 변혁자로 나타난다. 특히 예술에 대한 칼빈의 공헌은 지대하다. 칼빈은 종교로부터 예술을 분리시켜 예술이 자생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한 장본인이다.9)

요즘 20대 대학생들에게 EDM은 너무 익숙하고 일반화된 문화다. 이런 장르를 그냥 방치해 둔다면 결국 그 영역은 영원히 사단의 통치하에 종노릇하게 될 것이다. 이를 예수의 십자가로 구속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세상보다 기독교가 더 먼저 연구하고 창의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교회는 세속적인 음악 양식을 접할 때마다 정죄하고 거부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하지만 일정 시간 지나고 나면 항상 그 양식이 교회음악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교회는 늘 뒷북을 쳤다. 그것이 지난 과거 역사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더 이상 이런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음악이라는 일반 은총의 영역 안에서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고, 성경적 세계관 가운데 더욱 승화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이자 문화 변혁적 사명이다. 물론 세속화된 장르를 구속하고 재창조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겠지만, 누군가는 사명을 갖고 이 일에 도전해야 한다.

가치중립적인 예술

EDM(Electronic Dance Music)을 예배음악으로 사용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이슈다. 음악이 갖고 있는 상대적 가치의 이슈 때문이다. ‘음악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명제는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예배 전쟁(worship war) 논란의 진원지다. “록 음악으로 찬양할 수 있는가?”, “엇박자는 사람의 감정을 조작, 흥분시킨다”, “특정 종류 리듬은 사탄적이다”와 같이 이런 유의 억지 주장들은 성도를 불안하게 하고, 교회를 분열시킨다. 이런 주장들은 음악 자체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잠재한다고 가정한다.

일반 예술 윤리의 영역에서 비슷한 논의가 있어왔다. 예술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 심미주의와 절대적 도덕주의로 나뉜다.10) 전자는 예술이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고, 예술 자체의 미적 가치로서만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술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한다. 반면 후자는 예술의 존재 이유가 바른 행동과 덕을 장려하는 것이므로, 그 예술이 사회에 미친 도덕적 영향력을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조화한 입장이다. 선과 미는 비슷한 성격이 있으므로 서로 독립적인 가치를 지니지만 배척이 아닌 조화를 강조했다.

나는 음악은 가치중립적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예배와 음악 연구와 찬양 사역 경험에서 나온 나의 결론이다. 모든 예술 형태 가운데에서 가장 순수한 음악, 특히 소리나 음은 어떤 예술 매체보다도 가치중립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11) 중요한 것은 그 중립 지대에 어떤 내용, 어떤 진리, 어떤 의도가 그려지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음악을 다루는 사람에게 더 책임이 있다. 공교롭게도 양식의 가치중립성을 지지하는 학자, 사상가, 목회자들12)의 대부분이 이 책임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대표적인 석학이 휘튼칼리지 교회음악 학장인 해럴드 베스트이다. 그는 예술, 특히 음악은 도덕적으로 상대적이며, 진리의 말을 분명히 표현하기에는 불가능하고 주장한다. 그는 믿음, 신조, 도덕적, 윤리적 정확성 또는 심지어 세계관을 표현하는 능력 면에서는 예술과 음악은 본질상 중립적임을 성경적 근거와 해박한 음악 지식을 통해 탁월하게 변증13)해 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예술가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방법에 따라 예술과 음악을 만들고 있는 이유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강조한다.

20세기 기독교 지성의 한 분인 프란시스 쉐퍼는 양식(style)과 메시지(message)를 구분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예술을 표현할 때 경건한 양식이라든가 불경건한 양식이란 없고 이를 구분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자꾸 복잡해진다고 했다.14) 그래서 그는 예술가들에게 상당히 조심스러운 통찰력을 요구했다.

“어떤 면에서는 양식이란 완전히 가치중립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사려 없이 조잡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15) 그만큼 우리 찬양 사역자 또는 크리스천 음악가들은 더욱 책임감을 갖고 예술을 접근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는 어떤 장르의 예술, 음악을 어느 용도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명한 신학적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지도자를 길러내는 신학교에서 이런 영역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런 기초적인 관점조차 훈련되어 있지 않다. 그 결과 예술에 대한 편협한 관점과 단편적 이해로 예술가들을 대하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예배, 복음전도, 선교를 위해, 아울러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전공인 예술 활동을 세상 속에 어떻게 실현해 내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그 목마름이 극에 달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들을 단지 교회 성장과 목회적 필요를채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쯤으로 접근한다. 실제로 수많은 기독 예술가들로부터 자신을 교회 성장을 위한 일회용 소모품으로 여기는 목회자에 대해 실망한 소리를 자주 듣는다.

예술가들은 다양한 현대적 기법을 선택하고 적용할 때 더욱 지혜로워야 한다. 쉐퍼의 조언처럼 한 예술가가 현대적인 기술을 적용시키고 적응할 때 특정한 양식을 언제 적용하고, 언제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지 성령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평생 동안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16) 자신의 작품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번 디제잉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릴 것인가에 대해 대회 주최 측은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영역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수년간 연구하고 헌신해온 DJ를 초청했다. 모 교단에서 신학(M.Div.)을 공부했고, 디제잉을 교회음악에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전도사다. 일회성 해프닝으로 벌어진 무대가 아니었다. 진지한 고민으로 혁신을 시도한 젊은이들이다. 결코 쉽지 않은 분야, 욕먹을 각오하고 연구, 시도하는 이들을 격려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날 EDM 찬양 동영상을 보면서 문득 필자가 2년 전에 방문한 넘치는교회 예배가 생각났다. 설교 전 찬양만 1시간 반, 시계 가리고 예배드리는데 총 예배시간이 7시간인 교회였다. 예배 전반부에 춤을 추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찬양시간에 특이한 경험을 했다. 내 안에 오래 묻어두었던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어느 새 춤으로 터져 나왔다. 이때 밴드음악과 함께 흘러나온 음악이 EDM이었다.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EDM은 내 안의 온갖 어두움을 몰아내고, 하나님을 향한 활기찬 기쁨이요, 즐거운 축제의 노래를 표현하는데 참으로 적합한 음악 장르였다.

최근 필자가 사는 인근 메릴랜드에서 열린 힐송 라이브 콘서트에서도 EDM을 접했다. 모든 순서 끝자락 부른 2곡은 틴 힐송(Teen Hillsong)에서 발표된 EDM 찬양이었다. 집회 내내 경험한 깊은 은혜와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축제적 반응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찬양의 적절성, 연주력, 멀티미디어 활용 등에 균형과 절제미가 묻어있었다. 왜 이 찬양을 이 시점에서 하는지, 어떤 메시지를 나누려고 했는지, 회중이 이 연주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는지 등 모든 면에서 납득이 가고, 충분한 소통이 이뤄졌다. 최근 논란이 된 IVF 전리대의 디제잉도 매우 의미 있는 시도였다. 현장에 참석한 대부분의 학생들도 하나님 안에서 드리는 젊음과 기쁨의 축제를 표현하는데 적절했다며 큰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과도한 사이키 조명과 가사 없는 긴 리듬의 반복 등 영상 테크닉과 음악적 시도의 적절성에 대해서 조금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찬양의 적절성, 연주력, 멀티미디어 활용 등에 균형과 절제미 뿐 아니라 왜 이 찬양을 이 시점에서 하는지, 어떤 메시지를 나누려고 했는지, 회중이 이 연주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는지 등 모든 면에서 납득이 가고, 충분한 소통이 중요하다. EDM을 사용하는 hillsong-young&free.

최고의 가치는 하나 됨

이런 상황에서 아티스트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이 같은 이슈가 터졌을 때 교회와 아티스트는 서로 대립적인 입장에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것은 ‘하나 됨’이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4)

목사나 아티스트, 예배인도자나 평신도를 초월해서 우리는 한 소망을 가진 한 몸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헤럴드 베스트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이 영역을 웅변처럼 선언했다. 즉 탁월한 음악의 위대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의 가치라는 사실이다.17) 그는 예술계가 갈기갈기 찢겨 서로를 공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최고를 추구하고 탁월성을 주장하기 이전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 우선적이고 더 본질적인 책임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된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다. 최고의 교회음악을 추구하던 헤럴드의 진심 어린 충고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는 먼저 형제자매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음악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그 음악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18)

최근 SNS를 달구는 대부분의 논쟁 촉발자들의 특징은 이 우선순위를 무시한다. 그들은 “무엇이 좋으냐 나쁘냐, 도덕적이냐 비도덕적이냐, 고전적이냐 대중적이냐, 타당하냐 부당하냐, 낡은 것이냐 새로운 것이냐, 가치 있는 것이냐 무가치한 것이냐”19)에 집착하느라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을 놓쳤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1천 6백 년 전에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in necessar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in unnecessaris libertas),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in omnes charitas)” 외쳤던 성 어거스틴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된 유기적 공동체다. 기성세대의 눈에 설익은 모습으로 비치는 아티스트를 비난 투로 공격하는 태도는, 어린아이가 실수로 손에 가시가 찔려 피 흘리고 있는데 약을 발라주고 달래기는커녕 왜 그런 실수를 했냐며 비난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친 손가락을 아예 잘라버리는 냉혈 행위다. 오히려 교회는 타락한 가치들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싸워야 하는 크리스천 아티스트들이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자신의 도구인 예술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고 격려 받을 수 있는 영적인 요람이 되어 주어야 할 텐데 말이다.

시인의 리더십

더 나아가 아티스트들은 한 공동체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특유의 리더십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단순히 교회라고 하는 요람 속에서 쉼과 충전을 받아 누리기만 하는 갓난 아이의 단계를 넘어 위기와 혼란에 빠진 교회 공동체와 기독교 사회에 대안을 보여주고 문제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시인의 리더십’20)을 발휘해야 한다. 앨런 록스버그는 자신의 저서 <길을 잃은 리더들>(사랑플러스)에서 기독교 공동체 내에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탁월한 청사진을 제시했다.21)

그는 시인이 우리 시대의 리더라고 단언한다. 오늘의 교회는 즉각적인 해결방안, 통계와 고효율성, 표층적 트렌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방법론이 횡행하고, 그렇지 못하면 무가치하게 여긴다. 교회 공동체가 상실한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기 위해, 시인은 어떤 해결책 대신 음악, 이야기, 글, 이미지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대화를 촉발시키고 이전의 잘못된 전제를 무너뜨리는 화두를 제시한다. 대안적 상상력과 서사적 판을 짜고, 새로운 통찰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계발해 낸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처절하다. 목회자의 제왕적 리더십에 짓눌려 기죽어 있는 찬양인도자들, 바닥까지 무너진 CCM-기독문화 사역계에서 자기 연민과 자조에 빠져있는 기독 예술가들, 이들을 목회의 도구 정도로 취급하는 한국교회 풍조가 참으로 슬프다. 이렇게 지속되는 것은 결국 자기 무덤 파는 일이다. 눈앞에 당장 불편해 보이는 양식 논쟁에 좌충우돌하느라 다가올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소홀하면 안 된다. 교회는 이 땅의 시인들이 어깨를 펴고 설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교회의 앞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시인의 리더십을 누리기 위해 10년 앞을 보고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이유정 교수 | 리버티대학교 예배학 한국 디렉터이며 예배사역연구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크리스천에게 많은 영감을 준  CCM 듀오 좋은씨앗 멤버로서  “오직 주만이”,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아침안개 눈앞 가리듯” 등을 작곡했으며 저서로는 <잠자는 예배를 깨우라>(예수전도단)가 있다.

 

ㅡ주

1) 양재영 “EDM 쓰면 지옥 갑니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158
2) 정이철 “종교적 황홀경을 경계하라”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2907 
이종윤 “한국교회 예배가 사라지고 있다”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428
3) Walter Kolneder, Bach-Lexikon. Bergisch Gladbach, 1982, “Matthaus-Passion” 부분, 재인용 : 홍정수, 교회음악 예배음악 신자들의 찬양,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pp.30,31

4) 헤럴드 베스트, 신앙의 눈으로 본 음악 (IVP, 1995) p. 48
5)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에서 카이퍼는 칼빈의 문화, 예술관의 폭넓은 조예에 대해 강조했다.
6)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1권 창세기, 성서교재간행사, 1981, p. 211
7) Souvereiniteit in Eigen Kring 3rd ed., (Kowpen 1930) p. 32. 재인용, 핸리 R. 반틸, 칼빈주의 문화관, 이근삼 역, 성암사, p.168,
8) 스톤 강좌(Stone Lectures)로 알려져 있으며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으로 출간되어 있다.
9) 서성록, “카이퍼의 칼빈주의 예술론”, 미학·예술학연구 vol.14 (한국미학예술학회, 2001) : 칼빈주의에 뿌리를 둔 카이퍼의 ‘영역주권의 원리’에 기초한 예술해석을 다룬 소고다.
10) 심미적 예술주의의 대표적 인물은 오스카 와일드, 조엘 E. 스핑건. 스핑건 왈, “시가 도덕적이라든가 혹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삼각형은 도적적이고 이등변삼각형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절대적 도덕주의는 플라톤, 공자 등.
11)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문학과지성사, 1996)에서 저자 김욱동은 음악은 현실과 유리된 채 음악으로서의 자기목적성을 지닐 수 있기에 가치중립적 성격을 지닌데 비해, 구체적인 의사소통에서 생겨나는 언어는 결코 가치중립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음을 대비적으로 말한다.
12) 프란시스 쉐퍼, 예술과 성경, 김진선 역(IVP, 2002), Francis A. Schaeffer, Arts and the Bibl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3), Steve Lawhead, Rock Reconsidered: A Christian Looks at Contemporary Music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81), Gary L. Krug, Rock-the Beat Goes On: A Christian Prespective on Treands in Rock Music (Milwaukee: Northwestern Publishing House, 1987), Rick Warren, The Purpose Driven Church: Growth Without Compomising Your Message and Mission (Grand Rapid,: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5)
13) 그의 책 <신앙의 눈으로 본 음악> 2장 “음악의 의미”는 이 논쟁에 대한 성경과 신학, 음악적 통찰로 가득하다.
14) 프란시스 A. 쉐퍼, <예술과 성경> (서울:성광문화사, 1984), p.75
15) Ibid., p.81.
16) Ibid., p. 80
17) 헤럴드 베스트, p.78
18) Ibid., p. 87
19) Ibid., p. 86
20) 고대의 시인들은 예술의 영역으로 당시 시민들과 소통했다. 시인의 리더십은 한 사회나 국가, 공동체의 리더로 보는 시각이다. 서구 사회는 20세기 기술문명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대사회에 시인의 감성과 서사, 리듬, 상징, 통찰을 그리워하고 있다.
21) 앨런 록스버그, 길을 잃은 리더들(국제제자훈련원, 2009) pp. 208-215에서 ‘시인의 리더십’에 대한 자세한 서술 참고.

 

 

 

 

 

 


청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