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람 매거진

‘라푼젤’ 읽기 – 꼰대·권력에 대항하는 한 가지 방법

김영수의 디즈니 읽기 – <라푼젤> 꼰대권력에 대항하는 한 가지 방법

'덕후'는 아니라 주장하지만, 사실 '덕스러운' 남자, 김영수가 쓰는 '디즈니' 이야기. 그가 조곤조곤 펼쳐낼 '디즈니 세계'를 기대하시라!

라푼젤 포스터.

헬조선, 헬추석

정겨운 한가위가 코앞입니다. 반가운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정다운 인사를 나누겠죠. 대학은 어디 갔냐. 취직은 했냐. 연봉은 얼마냐. 나이가 몇인데, 결혼은 왜 안 하냐. 터울 지면 안 좋다, 더 늦기 전에 둘째 가져야지. 살이 더 찐 거 같다, 관리 안 하냐. 내 친구의 조카는 말이다 등등. 정정합니다. 헬추석이 코앞입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이렇게 부르고 싶을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정답을 아는, 날 오답 덩어리 채점지로 보는 꼰대들. 곰곰이 따져보면 제 삶 구석구석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보려 하지 않고 부탁한 적 없는 조언을 늘어놓습니다. 이랬어야지. 저렇게 해야지. 피하자 싶어 눈길을 TV로 돌려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연애는 이렇게, 여자라면 몸은 이래야 하고, 남자라면 요리도 이쯤은, 일등 엄마는 이렇고, 사랑받는 며느리는 이렇습니다. 하다못해 TV까지… 꼰대질은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습니다. 꼰대들 사이에서 당당히 살아남는 법, 어디 없을까요?

붕가붕가레코드 2010 추석 맞이 특별 컴필레이션 음반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앨범 표지.

고델의 꼰대술

<라푼젤>은 디즈니의 5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2011년에 개봉했습니다(남자아이들이 공주 느낌의 제목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미국에서는 ‘Rapunzel’이 아니라 ‘Tangled’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눈의 여왕>이 원작인 <겨울왕국> 역시 같은 이유로 ‘Frozen’이라는 제목이 달렸죠). 제작비를 보면 디즈니가 얼마나 공을 들인 작품인지 알 수 있습니다. 디즈니는 <라푼젤>에 2억 6천만 달러라는,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였습니다. 2억 달러를 들여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 넘는 수익을 올린 <토이스토리 3>에 비할 수는 없지만, <라푼젤> 역시 6억 달러가량의 준수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브라더 베어>, <카우 삼총사>, <치킨 리틀>, <로빈슨 가족>, <볼트>, <공주와 개구리> 등 디즈니는 2000년대에 들어서 픽사와 드림웍스에 밀려 흥행과 비평 두 측면에서 모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라푼젤>은 디즈니가 긴 침체기를 끝내고 반격을 시작한 작품입니다. 2년 후, 디즈니는 <겨울왕국>으로 정상을 탈환하게 됩니다.

찬란한 빛을 내서 신비한 힘을 보여주렴.
시간을 거꾸로 돌려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을 돌려주렴.
상처를 치유하고 운명을 바꿔줘.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돌려줘.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을. _마법의 주문

디즈니 <라푼젤>은 그림 형제가 쓴 원작 동화와는 내용이 꽤 다릅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황금빛 꽃이 피어납니다.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상처가 낫고 다시 젊어지는 마법의 꽃이었죠. 꽃을 발견한 사람은 마더 고델(Mother Gothel)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꽃을 독점하지만, 영화는 이를 못마땅해 합니다. “태양의 선물을 모두와 나누지 않고, 마더 고델은 그 치유의 능력을 몰래 숨겨둔 채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젊음만을 위해 사용했다.” (나레이션 중) 하지만 우연히 꽃을 발견한 왕궁 수비대 병사들 덕에 꽃은 왕비의 손에 들어가고, 병에 걸린 왕비는 꽃을 먹고 공주 라푼젤(Rapunzel)을 낳습니다. 황금빛 머릿결을 지닌 아이였죠. 고델은 다시 한 번 마법의 능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라푼젤을 납치합니다. 그리고는 깊은 숲 속에 있는 탑 안에 가둡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이야기, 즉 권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8살이 된 라푼젤은 탑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고델이 허락할 리 없습니다. 물론 라푼젤은 쇠사슬에 묶인 노예가 아닙니다. 고델은 탑을 자주 비우며, 라푼젤은 얼마든지 탑 밖으로 몰래 나갈 수 있습니다. 고델이 구속하는 것은 그녀의 신체가 아닙니다. 마법의 꽃과 달리 살아 움직이는 라푼젤을 소유하는 데 필요한 권력은 그와 전혀 다른 종류입니다. 엘리아스 카네티를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사냥꾼의 폭력”이 아니라 “양치기의 권력”에 가깝습니다. 양치기는 양고기를 얻기 위해 사냥꾼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양들을 대합니다. 길들여서 복종하게 만들죠. 이는 고델의 노래, ‘Mother knows best’에 잘 나타납니다.

우리가 왜 이 탑에서 지내는지 알지?
그래. 너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서야.
무엇이 최선인지는 엄마가 잘 알아.
엄마 말을 들으렴.
바깥 세상은 정말 무서운 곳이란다.
맹세할 수 있어. 탑 밖으로 나가면 분명히 잘못되고 말거야. _노래 ‘Mother knows best’ 중

“넌 몰라. 난 알지. 그러니 잔말 말고 내 말을 들어. 안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비참해질 테니.” 이게 고델이 라푼젤을 지배하는 마법의 주문입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권력은 지식입니다. 권력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결정하고, 그렇게 살도록 강제하는 힘, 그래서 그 외의 다른 삶은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힘입니다. 즉, 삶에 대한 가치평가를 독점하는 힘, “이렇게 살아라”라고 명령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권력입니다.

고델의 통치 전략은 꽤 치밀합니다. 우선 외부와의 접촉을 막고 자신이 승인하지 않은 일체의 지식을 금지합니다(라푼젤은 유일한 친구인 파스칼조차 고델 몰래 키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르칩니다. 세계는 악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널 이용하고 착취할 거다. 넌 어리숙해서 당하기만 할 거다. 사실 머리카락 외에는 네가 볼 게 뭐가 있니. 세상 사람들은 마법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 등등. 라푼젤은 세계와 자신을 모두 불신하게 되죠. 그녀는 세상은 악하고 자신은 무력하다고 믿게 됩니다. 결론은 뻔합니다. There is no alternative! 대안은 없다! 1) 세상은 악하고 넌 어리숙하니, 이 탑에 있는 것이 최선이다. 라푼젤의 신체를 통제하기 위해 고델은 그녀의 정신을 지배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 존재합니다. 이게 최선의 삶이라고, 대안은 없다고, 난 널 위한다고, 너보다 내가 더 잘 아니 내 말을 들으라는 그 잘난 지식들.

 

마더 고델.

탑이 싫어서

탑 안에 있는 한 엄밀하게 말해 라푼젤 자신의 삶이란 없습니다. 허락된 것은 삶의 외양을 한, 그러나 진정한 삶은 아닌 어떤 것뿐입니다. “진정한 내 삶은 도대체 언제 시작될 수 있을까?” (노래 ‘When will my life begin’ 중) 18살이 되기까지 라푼젤에게 ‘삶’이란 시작도 되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본질이 그렇듯, 자유의 열쇠도 지식에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 소크라테스(Socrates)에 따르면 모든 지식에 선행하는 근원적인 앎은 바로 자신에 대한 앎입니다. 라푼젤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라푼젤을 탑 밖으로 이끈 것은 매년 그녀의 생일마다 밤하늘을 수놓는 ‘떠다니는 빛’입니다. 그녀는 빛을 따라, 자신의 귀환을 기원하며 정성스레 등불을 띄우는 부모님과 이웃이 있는 고향을 향해 걷습니다. 라푼젤 자신이 본래 한 조각의 빛이기에, 이 길은 자신을 향한 여정이기도 합니다. <라푼젤>은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귀환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담은 귀향의 드라마입니다.

 

떠다니는 빛.

물론 저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라푼젤을 도운 사람들이 있었죠. 플린 라이더(Flynn Rider)와 ‘안락한 오리새끼 주점’ 사내들입니다. 플린은 라푼젤을 고향까지 안내합니다. ‘안락한 오리새끼 주점’ 사람들은 플린과 라푼젤을 왕궁 수비대의 손에서 구해주고, 나중에는 플린의 탈옥까지 돕습니다. 거칠게 보여도 알고 보면 그리 흉악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현상 수배범(플린)을 찾았다고 왕궁 수비대에 직접 신고할 정도로 떳떳한 사람들이죠. 그들이 생면부지의 라푼젤과 플린을 도운 건 ‘꿈을 꾼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썩 어울리지 않는 꿈을 가졌습니다. 이런 식이죠. 한 손이 없는데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거나, 대단히 못생겼는데 사랑이 하고 싶다거나, 아주 험상궂은 데 유니콘 인형 수집가가 되고 싶다거나. 그 어울리지 않는 꿈을 용케도 포기하지 않고 버틴 그들은 떠다니는 빛이 보고 싶다는 라푼젤을 곧바로 이해합니다.

안락한 오리 새끼 주점. 여기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 바깥으로 내밀려난 사람들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요. 수도 없이 들었겠죠. ‘한 손이 없는 주제에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될 거로 생각하니?’와 같은 말들을. 그렇게 세상에서 밀려난 오리 새끼들이 모여 안락한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바깥세상의 가치관이 완전히 전복됩니다. 여기서 가장 환영받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등불을 보겠다는, 효용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라푼젤의 꿈입니다. 반면 부자가 되겠다는 플린의 꿈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바깥세상이라면 반응이 분명 달랐을 텐데요. 라푼젤은 오리 새끼 공동체에서 삶을 새롭게 배웁니다. 주점의 사내들에게는 세상은 악의로 가득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의 불가능한 꿈을 격려하는 친구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플린에게는 서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는 사랑을 배웁니다. 이 새로운 앎이 고델의 권력에 균열을 냅니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고? 오, 왜 그런지 알겠네.
이제 최선이 뭔지 (내가 아니라) 니가 안다는 말이지.
충분히 성숙해졌다는 얘기구나.
그래, 아주 똑똑한 아가씨가 다 됐어.
니가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지.
(…) 그럼 가서 그 남자를 시험해 보렴. _노래 ‘Mother knows best(Reprise)’ 중

오리새끼 주점 사내들.

공부하는 삶

하지만 고델은 다시 음모를 꾸며 라푼젤을 탑에 가두고 플린을 칼로 찌릅니다. 라푼젤은 이제 모든 게 고델의 음모라는 걸 알지만 플린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플린 역시 라푼젤을 위해 자신을 포기합니다. 상처를 치료할 기회를 포기하고 라푼젤의 머리를 자르죠. 플린은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고,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고 타인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게 하는 머리카락을 잘라야 한다는 것을. 본인에게 가치와 의미를 주지 않는다면, 마법의 머리카락이라 한들 남들이 붙여주는 한갓 가격표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높은 사회적 가치를 더해준다 해도, 머리카락보다는 라푼젤 자신이 더 소중합니다. 흥미롭게도 머리카락을 자른 뒤에도 마법의 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눈물로 그 형태가 바뀔 뿐이죠. 생각해보면, 마법의 능력은 꽃에서 사람으로, 다시 사랑의 눈물로 점점 소유하기 힘든 형태로 바뀝니다. 사랑의 눈물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본인조차 사랑의 눈물을 억지로 흘릴 수는 없으니까요.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
내가 여기서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_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중

때로는 세상이 하나의 탑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시험에는 정답이 있어도,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어릴 때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자라면 알게 되죠. 인생에도 미리 정해진 정답이 있다는 것을. 어딘가 마더 고델이 대학, 영어점수, 직장, 아파트, 결혼 등 우릴 둘러싼 모든 것에 표준을 정해 놓고 탑에서 나가지 못하게 우리를 옥죄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작품해설’에서 문학평론가 허희는 한국을 “거대한 사육장”에 비유합니다. 그는 한국이라는 “우리(cage)에서의 탈출을 꿈꾸고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아니 “우리를 부숴버리자”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라푼젤은 어땠던가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한 긴 세월, 멀리 보이는 빛, 응원해 준 친구들. 권력이란 앎의 문제이며, 자유는 스스로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를 때 찾아온다는 것도 떠올려봅니다. 떠다니는 빛이 멀리나마 보이고, 자를 머리카락이라도 있었던 라푼젤이 부럽기도 하지만, 우리도 걸어야죠. 내 영혼을 돌보고(epimeleia heautou) 삶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공부하는 삶으로.

멈추지 않을 거에요.
죽을 때까지 매순간 당신과 싸울 거에요.
당신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거에요. _대사, 라푼젤이 고델에게

그림 6

주ㅡ

  1. 영국의 정치인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영국의 경제구조를 개혁하며 신자유주의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며 내건 구호, 앞글자를 따서 TINA라고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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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와 야수> 읽기(1) – please에 응답하기, welcome이라고 말하기
<미녀와 야수> 읽기(2) – 그대, 나를 모두 가지세요
<인사이드 아웃> 읽기 – 당신의 빙봉은 언제 사라졌나요?
<인어공주> 읽기 – 요조숙녀, 악녀, 말괄량이
김영수

타고난 천재. 다만 어릴 때 크게 아픈 뒤로 천천히 회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