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람 매거진

나는 왜 이 책을 봉인했었나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허영진의 명랑 독서 (7) 나는 왜 이 책을 봉인했었나
<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문에출판사 펴냄
서점 직원이자 '윤하 아빠'인 허영진이 '발칙하고 명랑하게' 쓰는 책 그리고 세상 이야기.

봉인한 책, 영화로 만나다 

지난 토요일은 나에게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제 만 네 살이 넘은 딸아이와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팝콘을 나누어 먹은 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함께 본 영화는 칼릴 지브란의 베스트셀러이자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자>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내가 ‘게다가’라고 한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당시 교회 구역장이었던 어머니의 구역 구성원인 집사님께 천자문을 배운 적이 있었다. 집사님은 동양철학 석사 학위까지 받았던 분이었고 천자문이 만들어진 배경부터 아주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다.

당시 천자문을 공부하며 집사님 집을 드나들었는데,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등을 보면서 책을 빼 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놀랍게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꽂혀 있었고, 무엇보다 12살 소년이었던 나를 사로잡은 책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였다. 집사님의 서가에서 내가 본 책은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시인 강은교 선생님의 번역판이었다. 얇고 구성도 단출한 책이었다. 오래되어 빛이 바랜 듯한 색의 표지 위에서 연필이나 목탄으로 생각되는 도구로 그린 형형한 눈빛의 사내가 전혀 멋스럽지도 않은 서체의 ‘예언자’라는 제목과 어울려 독특한 아우라를 뿜고 있었다.

나는 서서 ‘휘리릭’ 넘겨 보았다. 본문 역시 촌스러운 활자들이 흑백의 그림들과 어우러져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묘했다. 나는 잠시 그림에 매혹되어 서가 앞에 선 채로 책을 꽤 오래 들여다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쇄된 책의 내용에 취한 게 아니고 책 그 자체에 취한 최초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참 이상했다. 왜냐면 그 책을 당장 읽지 않았고, 그 책을 앞에 두고 나 자신과 비밀스러운 약속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책을 앞에 두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대학생이 된다면 그때 가서 이 책을 읽어보리라’  

무엇에 홀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스스로 이 책을 봉인했다. 그러고는 정말로 대학에 합격한 후에 가장 가까운 서점에 들러 <예언자>를 샀다. 여전히 같은 표지의 같은 책이었다. 이 책과의 약속은 어린 시절의 그 흔한 비밀스러운 약속들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끝내 지켜냈다. ’20세기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카피처럼 어쩌면 흔해 빠진 책인데 나에게는 매우 각별하고 특별한 책이 된 셈이다.

갇힌 현자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영화를 보면서 딸아이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라이언 킹>을 연출한 로저 알러스 감독이 주인공을 도와주는 익살스러운 동물 캐릭터를 배치했다던가, ‘디즈니스러운’ 설정을 한 덕분에 걱정한 만큼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았다. 일단 딸아이는 라지 사이즈 팝콘에 집중했던 터라 특별히 문제없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원작에 극적 구성을 더했다. 원작은 예언자 무스타파가 배를 타고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사람들이 ‘마지막 말씀을 남겨 달라’고 하자 전하는 고별 설교다. 갈등이 구성될 소지가 없는 이야기 구조인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무스타파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하여 7년 동안 가택 연금을 당한 시인’으로 설정했다. 어느 날 마을에 배가 들어오고 무스타파가 가택 연금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항구로 향하는 이틀 동안의 일을 담았다(물론 가택연금을 지시한 정부가 무스타파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내줄 리 없으나 스포일러는 여기까지). 여기에 아빠를 잃은 후 목소리를 함께 잃은 어린 소녀 알미트라와의 만남과 우정을 추가했다.

배를 타러 항구로 향하는 길에 무스타파는 사람들을 만나며 설교를 한다. 이를 테면 알미트라의 엄마와 알미트라에게 ‘자녀에 관하여’ 들려주고, 결혼식 잔치의 신혼부부에게는 ‘결혼에 관하여’들려주고, 장터의 사람들에게는 ‘노동에 관하여’를 들려주는 식으로 책의 각 꼭지를 소화하고 있다. 이렇게 무스타파의 잠언이 펼쳐질 때면 영화 전체를 연출하는 감독 외에 별도의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각 꼭지를 맡아서 환상적인 영상을 선보인다.

영화-예언자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포스터

사실 ‘갇힌 현자와 머리가 말랑말랑 한 어린 친구들과의 만남’ 모티브는 꽤 상투적이다. 원작 자체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책이어서 일까, 나는 상투적인 설정마저도 꽤 마음에 들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결국,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는 팝콘에 집중한 딸아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눈물을 삼키고야 말았다.

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나 예언자이자 시인인 무스타파가 이야기한 것은 풍성한 삶,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그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아름다운 잠언일 뿐이었다. 이런 무스파타에게 정부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혁명가의 혐의를 덧씌우고 불순분자라는 빨간 딱지를 붙인다. 책을 읽으면서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도전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내 십 대 시절에 자가 봉인시켜 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10대 때 책 표지를 보고 느꼈던 묘한 경외감, 20대에 겉멋 들어서 아무도 읽지 않을 법한 책을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읽었을 때 느꼈던 우쭐함을 지나 일을 하고 사랑과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은 30대 후반에 이 책과 영화에 대해서 느끼는 느낌이 전부 다르다. 좋은 책, 독자에게 영향력을 주었던 책이라면, 이렇듯 개인의 생애주기에 따라 책에 따르는 미래의 삶을 그려 보거나, 혹은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거나 현재의 삶을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이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이야기는 나의 날개고, 너는 나의 메신저란다”  

(너무 단정 지어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복음주의적 회심을 체험한 이들 누구에게나 자신이 상상하는 예수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머리가 곱슬곱슬한 파란 눈의 금발을 가진 예수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1세기 초반의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의 얼굴을 가상으로 묘사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예언자> 표지의 남자가 꼭 그랬다. ‘사자의 눈’을 지닌 채 사려 깊은 말을 전할 것만 같은 입술을 가진 그 남자 말이다. 나이를 먹으며 책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혹은 숨겨진) 의미나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졌듯 예수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무스타파를 정치범으로 다루는 애니메이션의 설정이 개인적으로도 정말 와 닿았다. 예수 역시 과거의 예수와는 달리 지금의 나에게는 ‘정치적인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코딱지만한예언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 예언자 표지. 현재는 다른 표지로 바뀌었다.

영화 거의 끝 부분, 무스타파는 주민들이 정부에 맞서 소요를 일으키려 하자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갇혀 있는 무스타파를 몰래 찾아간 알미트라에게 그는 자신의 글과 그림들을 부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날개고, 너는 나의 메신저란다”  

예수든 무스타파든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은유였고 이야기였다. 유지(遺志)를 남긴다는 건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고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 <예언자>라는 유지를 이어 어떤 이야기를 쓰며 사는 걸까?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가장 자연스러운 삶, 풍성한 삶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딸은 종종 이 영화를 두고 “알미트라 언니 음악 들려줘”라며 조른다. 이 아이가 ‘복음’이라는 가장 풍성한 메시지의 ‘날개가 달린 메신저’가 되길 바란다.

 


허영진

대형 서점에 근무하지만 종이책을 팔지는 않는다. 오순절에서 자라 고신에 자리 잡았고, 실존적으로는 '가나안 성도'에 더 가깝다. 눈물 쏙 빼는 간증서를 하나 써 보고 싶은 소원이 있어 개신교 출판계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지금은 '갸웃'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