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람 매거진

[희년 이야기 02] 희년(Jubilee),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교황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반구이(Bangui)에 있는 대성당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으로 12월 8일부터 시작되는 '자비의 특별희년(The Extraordinary Jubilee Year of Mercy)'의 개시를 알렸습니다. 원래 가톨릭교회에서는 희년(Jubilee) 혹은 성년(Holy Year)을 시작할 때,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아프리카 순방 중에 가난한 아프리카 교회와의 연대를 상징하며 이를 시행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교황의 행보가 특별히 2015년 12월에서 2016년 11월까지 일 년 간 특별희년이란 이름으로 이어질 텐데, 이 기회에  '희년 정신'을 교회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되새겨볼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청어람매거진에서는 로마가톨릭의 희년 역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희년'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희년은 원래 질서로 돌아가는 것

‘희년’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희년을 다루는 레위기 25장은 먼저 안식일에 대해 언급하고, 그다음으로 안식년, 그리고 희년을 이어서 말합니다. 희년은 무엇보다 ‘쉼’입니다. 6일 동안 일하면 일곱째 날에 쉬라고 말합니다. 6년 동안 일했으면 7년째에 쉬게 해야 합니다. 땅을 놀렸습니다. 그 안식년을 일곱 번 하게 되면 ‘희년’으로 땅을 원래 주인에게로 되돌려주고, 노예는 해방하고, 빚은 탕감해 주었습니다. 희년은 안식년의 안식년이고, 대 안식년입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희년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였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지파(Tribe)-친족(Clan)-가족(Household)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출애굽 이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지파 단위로 땅을 분배해주고, 이를 다시 친족 단위로 나누고, 최종적으로는 가족에 따라 자신들의 기업(inheritance)을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50년마다 땅을 되돌려주는 것은 원래 분배된 질서로 돌아가는 작업입니다. 땅을 자기 가정의 기업으로 삼아 생활을 도모하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팔게 되는 경우, 일차적으로 친족들이 그 땅을 사들였다가 희년이 되면 되돌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혹 다른 사람들에게 팔게 되면 친족들이 돈을 빌려주어서 그 땅을 되사게 하되, 그를 일꾼으로 두거나 빚을 유지하고 있다가 희년이 되면 해방해주고 탕감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약속의 땅에 입성할 때 나누어주었던 기본자산을 회복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재산이 넉넉한 친족이 다른 이들의 땅을 다시 사들여 주되,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거나, 토지를 집중적으로 소유를 하지 못하도록 50년마다 원상복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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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에 벌어지는 일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자면, 첫째 ‘부채탕감(Cancelling the Debt)’ 둘째, ‘노예 해방(Liberating the Slave)’ 셋째, ‘토지반환(Return of the Land)’입니다. 50년째가 되면 빚지고 있던 이들은 탕감받습니다. 노예 신분에서는 해방됩니다. 땅은 원래 배분된 대로 되돌려주게 됩니다. 이를 통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기업(inheritance)의 회복이고, 원래의 것에서 빼앗기거나, 무너진 것을 무르는(redeem) 과정입니다.

당연히 등장하는 질문은, 그렇다면 희년의 규범은 이스라엘이란 공동체 내에서만 가능한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일차적으로는 맞습니다. 희년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공동체’에 허락된 기본자산을 원래 정한 대로 회복하는 것이니까요. 그 공동체는 레위기나 출애굽기 등을 비롯해서 언제나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한 여호와니라”는 대명제 아래에서 시작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고대 근동의 문화권에서도 빚이나 땅이나 노예를 해방해주는 경우들은 존재했습니다. 유사한 제도는 고대 바벨론, 아시리아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고대 근동국가들에서는 왕의 시혜적 정책으로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지만, 희년제도는 하나님이 직접 정하신 것으로 나오고 주기적으로 시행하게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공동체의 기원과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지점에서 희년의 가능성이 고대의 특정한 시점에만 국한되지 않고 훨씬 다양한 시공간 속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희년 사상의 영성화>(대한기독교서회) 라는 책을 쓴 김병하는 ‘신구약 중간기 문헌들을 보면 희년이 사회적 제도보다는 종말까지 남은 기간을 예측하는 단위로 쓰이는 등 영성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신약의 누가복음 4장 같은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이사야 61장을 인용한 이 본문은 메시아의 사명을 전면에 내건 예수님의 출사표쯤 되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에 등장하는 ‘주의 은혜의 해’가 희년을 가리킨다는 것은 거의 이의가 없는 해석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희년’의 맥락에서 전면적으로 선포하고 있다면, 우리의 기독교 이해에 희년이 훨씬 더 비중 있는 위상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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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plxabay.com

희년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초대교회가 모든 소유를 공유한 모습을 ‘원시 공산사회’쯤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런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20세기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당대의 희년 이해일 겁니다. 찾아보면 신약의 여러 곳에서 희년적 암시를 발견합니다. 예수를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던 젊은 청년은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 앞에 좌절합니다. 성서학자 중에는 이 재산이 다름 아닌 토지였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면 삭개오는 예수를 따르기로 하면서 자신이 토색한 것을 다 갚고,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당대에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자신의 땅을 팔고, 빚을 탕감해주는 일이 당연하게 제자도에 수반되는 일이란 강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의식이 강하게 존재했던 것이지요.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런 관행을 거스르며 거짓말을 하다가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에 사회경제적인 부분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주요한 개념과 상징, 비유는 희년과 연관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 6:12)”는 의역하지 않은 원문대로 쓰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준 것 같이 우리 빚을 탕감해주시고”가 됩니다. 신약에서 죄의 용서는 언제나 빚의 탕감에 빗대어 설명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마태복음 18:23-35)“의 비유를 기억하거나, “향유를 부은 죄인(누가복음 7:41-47)”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누4:41-42)“는 말씀이 등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핵심적인 개념인 죄의 용서, 구원 등을 말할 때 끊임없이 사용하는 용어와 비유들이 ‘빚의 탕감’, ‘노예로부터 해방’, ‘기업의 회복’, ‘안식에 들어감’, ‘무름(Redemption)’ 등 희년의 기본 개념과 직결된다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요? 그리고 죄의 용서를 빚의 탕감 경험으로 설명하는 내용을 들으며 신앙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빚에 대해 갖는 태도가 과연 단순히 수사적 수준에 머물 수 있을까요? 신약의 구원관, 혹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단하게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표출되어야 할 가치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영혼 구원론’으로 간주하며 ‘희년의 영성화’에 편승할 수는 없습니다.

덧붙임)

논의가 여기까지 오게 되면 ‘희년’은 매우 강력한 유대-기독교적 개념이고 기독교인이 아닌데 이런 논의에 관심 가질 이유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도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근거에서 나오는 규범인데,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이 이런 논의에 어떤 구속력을 가지고, 매력을 느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원칙적으로는 동감입니다만, 앞으로 이어갈 내용에서도 나오겠지만 기독교인들이 역사적으로 희년정신에 더 투철했거나 기독교 신앙을 이런 모습으로 이해한 흔적이 월등하게 우월하지는 않습니다. 희년정신이 오히려 기독교 역사 내부에서는 왜소화되거나 주변화되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희년 논의를 새롭게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희년정신의 편린을 여러 양상으로 살려내었던 다양한 노력을 재발굴하고 이를 높이 평가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희년이 기독교의 전유물이라고 주장하려면, 기독교가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을 때라야 설득력이 있지 “독점권을 주장하면서 그 좋은 걸 가지고 있으면서 왜 전혀 살아내지는 않는가?” 반문을 자초할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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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청어람 대표. 복음주의 운동가. 몇권의 책을 썼지만, 좌우명은 "노는게 제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