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어람은 우리 신앙과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가벼운 대화모임부터 대학원 수준의 전문 강의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청어람에서 강의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가끔씩 받곤 하는데요, 정성껏 준비한 기획을 제안받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은 저희 기획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겠지요. 얼마전 정제기 선생님께서 ‘청어람에서 열고 싶다’며 정성껏 준비한 강의 계획서를 보내주셨을때 오랜만에 그런 짜릿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재밌겠다! 해야겠다!”
조금 더 강의를 잘 준비하고 싶어서 선생님께 인터뷰를 부탁드렸습니다. 서면으로 진행된 인터뷰는 선생님의 구수한(?) 입담처럼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제가 느낀 감정을 함께 느끼고, 함께 공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나 요즘 관심을 두고 계신 주제도 함께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제기라고 합니다. 영남대학교에서 칸트 윤리학과 종교철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는 감신대를 비롯 여러 대학에 강사로 출강하고 있습니다. 칸트 철학을 희망의 철학으로 해석하는 연구들을 바탕으로, 철학과 신학의 대화, 철학과 문학의 대화가능성을 나름대로 모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니체와 레비나스까지도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부조리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경험을 시작으로 “왜 선한 사람은 고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승승장구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조금씩 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고민이 이어져 칸트학자의 길에 들어섰고,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지금 니체인가?
이번 강의에서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함께 읽습니다. 선생님은 원래 칸트 윤리학을 전공하셨는데요. 어떤 계기로 니체, 특히 『도덕의 계보』를 함께 읽어보자고 생각하셨나요?
칸트와 니체는 서로를 매우 적대할 수밖에 없지만, 서로 무척이나 닮은 거울쌍 같은 철학자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칸트 전공자로서 저는 니체의 강력한 비판자로서 니체를 정확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출강하는 학교에서 니체로 수업을 몇번 진행했습니다. 특히 감신대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니체의 반-기독교적 저작을 함께 읽고, 그 비판점들을 반성적으로 생각하는 작업은 꽤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청어람과 평화교회 연구소와 함께 안티크리스트 강독 모임을 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난 학기에는 <도덕의 계보>일부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는데, 학생들의 관심도가 눈에 띄게 달랐습니다. 열띤 질문과 관심을 보면서 니체 철학이 지닌 매력과 창조성, 현재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칸트주의자이고, 니체 철학에 크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현대 사회의 여러 병리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칸트보다 니체가 훨씬 더 유효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을 해체하고,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을 구분합니다. 강자와 주인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탁월함을 찾고, 그 탁월함으로부터 가치를 만들어가는 반면, 노예적인 인간은 원한과 증오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즉, 자신보다 강하고 탁월한 자들을 악한 자로 간주하고, 그에 핍박받는 자신을 선한 자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적인 인간의 특징이 바로 원한과 증오의 감정입니다. 노예적인 인간은 원한과 증오로 인해 기존의 도덕이 지닌 “좋음과 나쁨Gut und Schlecht”을 전도시켜 “선과 악Gut und Böse”으로 왜곡시켜 버렸다는 것이 니체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니체는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지금 현재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저는 진단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사례들이 노예적인 태도의 전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다만, 함께 공부하는 중에 오늘의 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과 반성들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기독교 배경을 가진 수강생들과 니체를 읽는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니체를 기독교적으로 너무 쉽게 해석하거나, 반대로 너무 쉽게 거부하지 않으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기독교인들이 니체를 너무 쉽게 활용하거나 곡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인들은 니체를 잘 모릅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과, 무신론자라는 정도의 입장만을 겨우 알 뿐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기독교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니체는 원래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젊은 시절에는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신학을 포기하고 고전문헌학의 영역으로 전향합니다. 니체는 당시의 최신 신학적 관점, 즉 1800년대 중후반부의 신학, 문서설과 역사 비평까지 꽤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니체 저작에서 이런 면이 상당 부분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니체를 가능한 한 정확하고 꼼꼼하게 이해해야만, 비로소 니체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출발선상에 서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가 약간 공부하여 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바로 거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니체를 정확하게 공부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만 간신히 니체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업조차도 아주 오랫동안의 고민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왜 어떤 기독교는 원한의 언어에 사로잡히는가?

노예 도덕이라는 말도 인상적이지만, 강의 제목에 나오는 ‘원한감정’이라는 표현도 조금 낯설면서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니체가 말하는 원한감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억울함이나 분노와 어떻게 다른가요? 또 이런 감정이 피해의식이나 종교적 확신과 결합할 때,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시나요?
우선 원한, 혹은 원한감정은 니체가 말하는 Ressentiment(르쌍티망)를 옮긴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억울함, 분노, 상처와는 조금 다릅니다. 억울함이나 분노는 어떤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런 분노는 정의로운 저항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원한감정은 직접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분노가 마음속에 오래 축적되고, 그것이 도덕적 판단의 형식으로 변형된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거나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못할 때, 인간은 상대를 “악한 자”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선한 자”로 해석하려 합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원한의 핵심입니다.
앞서 설명한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강한 자가 좋고 약한 자가 나쁘다는 기존의 가치 질서를 뒤집는 혁명입니다. 강한 자는 악한 자가 되고, 약한 자는 선한 자가 됩니다. 원한은 바로 이 가치 전도의 심리적 동력입니다.
이 점에서 원한감정은 단순한 상처와 다릅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모두 원한의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억울함을 느끼는 사람이 모두 노예도덕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느냐입니다. 상처가 자기 성찰과 정의로운 저항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 선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저들은 악하다”는 도식으로 굳어질 때, 그리고 자기 정체성이 적의 악마화에 의존하게 될 때, 니체가 말하는 원한감정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니체가 이러한 가치 전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지목한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니체는 고대 유대 사제적 전통과 그것을 계승하고 보편화한 기독교가 주인도덕을 뒤집고 노예도덕을 확산시켰다고 봅니다. 니체의 해석에 따르면, 사제적 인간은 약자들의 고통과 원한을 도덕적·종교적 언어로 조직합니다. 가난한 자, 약한 자, 빼앗긴 자, 고통받는 자를 선한 자로 부르고, 강한 자, 지배하는 자, 자기 삶을 긍정하는 자를 악한 자로 규정합니다.
이것을 전적으로 동의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한 측면도 있지만, 니체의 분석을 통해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 안의 특정한 현상을 이해하는 통찰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극우화된 기독교 담론에서는 외부의 적을 먼저 설정하는 방식이 자주 나타납니다. 공산주의자, 좌파, 세속주의자,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진화론자 등 자신들이 보기에 교회를 위협하는 어떤 집단이 먼저 “악”으로 규정됩니다. 그리고 그 악한 세력에게 핍박받는 자신들은 참된 신앙을 지키는 선한 사람들로 이해됩니다. 이때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이 되기보다, 자기 집단의 피해의식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기 쉽습니다.
음모론도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적 확신과 결합합니다. 음모론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저 악한 세력이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의미를 줍니다. 패배감과 분노, 상처와 불안을 하나의 서사 안에 묶어 줍니다. 그리고 종교적 언어가 여기에 결합하면, 그 음모론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영적 전쟁, 순교, 마지막 때의 싸움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억압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편에 있다”는 종교적 확신으로 바뀌면, 매우 강력한 자기정당화가 생깁니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원한감정이 종교적 언어를 통해 도덕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독교 신앙을 원한의 산물로 환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분명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회개의 언어, 약자와 고통받는 자를 향한 연민, 자기 의를 내려놓는 겸손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기독교는 원래 원한의 종교인가?”가 아니라, “왜 어떤 기독교는 원한의 언어에 사로잡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강의에서는 바로 그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니체라는 거울을 통해, 오늘 우리의 신앙이 진실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적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피해의식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함께 성찰해 보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이 흥미롭게 느껴지더라도 철학책이나 고전 강독이 처음인 분들은 조금 부담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 공부 경험이 없는 사람도 이 강의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이 강의를 통해 수강생들이 꼭 가져갔으면 하는 질문이나 감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데카르트나 칸트, 헤겔, 하이데거와 같이 매우 체계적인 철학자들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서양철학의 전통에 익숙할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철학에서 이러한 체계를 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철학이 세워 왔던 모든 가치와 체계들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철학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니체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철학자들보다는 문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니체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곤 합니다. 이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으신 분들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일수록 니체에게서 많은 통찰들을 얻어가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니체에 다 동의하실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그보다는 니체가 말하는 전통 도덕 비판에서 여러분 각자에게 다가오는 어떤 영감 같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애매하게 남아 있던 무엇인가가 조금은 해결되거나 깨뜨려지는 경험들을 하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지점들이 바로 니체가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일종의 영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영감이 여러분들의 삶 앞에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현철

[특강] 원한의 도덕과 음모론의 신앙 살펴보기
청어람은 우리 신앙과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가벼운 대화모임부터 대학원 수준의 전문 강의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청어람에서 강의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가끔씩 받곤 하는데요, 정성껏 준비한 기획을 제안받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은 저희 기획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겠지요. 얼마전 정제기 선생님께서 ‘청어람에서 열고 싶다’며 정성껏 준비한 강의 계획서를 보내주셨을때 오랜만에 그런 짜릿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재밌겠다! 해야겠다!”
조금 더 강의를 잘 준비하고 싶어서 선생님께 인터뷰를 부탁드렸습니다. 서면으로 진행된 인터뷰는 선생님의 구수한(?) 입담처럼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제가 느낀 감정을 함께 느끼고, 함께 공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나 요즘 관심을 두고 계신 주제도 함께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제기라고 합니다. 영남대학교에서 칸트 윤리학과 종교철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는 감신대를 비롯 여러 대학에 강사로 출강하고 있습니다. 칸트 철학을 희망의 철학으로 해석하는 연구들을 바탕으로, 철학과 신학의 대화, 철학과 문학의 대화가능성을 나름대로 모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니체와 레비나스까지도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부조리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경험을 시작으로 “왜 선한 사람은 고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승승장구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조금씩 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고민이 이어져 칸트학자의 길에 들어섰고,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지금 니체인가?
이번 강의에서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함께 읽습니다. 선생님은 원래 칸트 윤리학을 전공하셨는데요. 어떤 계기로 니체, 특히 『도덕의 계보』를 함께 읽어보자고 생각하셨나요?
칸트와 니체는 서로를 매우 적대할 수밖에 없지만, 서로 무척이나 닮은 거울쌍 같은 철학자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칸트 전공자로서 저는 니체의 강력한 비판자로서 니체를 정확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출강하는 학교에서 니체로 수업을 몇번 진행했습니다. 특히 감신대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니체의 반-기독교적 저작을 함께 읽고, 그 비판점들을 반성적으로 생각하는 작업은 꽤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청어람과 평화교회 연구소와 함께 안티크리스트 강독 모임을 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난 학기에는 <도덕의 계보>일부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는데, 학생들의 관심도가 눈에 띄게 달랐습니다. 열띤 질문과 관심을 보면서 니체 철학이 지닌 매력과 창조성, 현재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칸트주의자이고, 니체 철학에 크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현대 사회의 여러 병리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칸트보다 니체가 훨씬 더 유효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을 해체하고,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을 구분합니다. 강자와 주인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탁월함을 찾고, 그 탁월함으로부터 가치를 만들어가는 반면, 노예적인 인간은 원한과 증오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즉, 자신보다 강하고 탁월한 자들을 악한 자로 간주하고, 그에 핍박받는 자신을 선한 자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적인 인간의 특징이 바로 원한과 증오의 감정입니다. 노예적인 인간은 원한과 증오로 인해 기존의 도덕이 지닌 “좋음과 나쁨Gut und Schlecht”을 전도시켜 “선과 악Gut und Böse”으로 왜곡시켜 버렸다는 것이 니체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니체는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지금 현재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저는 진단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사례들이 노예적인 태도의 전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다만, 함께 공부하는 중에 오늘의 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과 반성들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기독교 배경을 가진 수강생들과 니체를 읽는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니체를 기독교적으로 너무 쉽게 해석하거나, 반대로 너무 쉽게 거부하지 않으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기독교인들이 니체를 너무 쉽게 활용하거나 곡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인들은 니체를 잘 모릅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과, 무신론자라는 정도의 입장만을 겨우 알 뿐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기독교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니체는 원래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젊은 시절에는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신학을 포기하고 고전문헌학의 영역으로 전향합니다. 니체는 당시의 최신 신학적 관점, 즉 1800년대 중후반부의 신학, 문서설과 역사 비평까지 꽤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니체 저작에서 이런 면이 상당 부분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니체를 가능한 한 정확하고 꼼꼼하게 이해해야만, 비로소 니체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출발선상에 서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가 약간 공부하여 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바로 거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니체를 정확하게 공부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만 간신히 니체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업조차도 아주 오랫동안의 고민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왜 어떤 기독교는 원한의 언어에 사로잡히는가?
노예 도덕이라는 말도 인상적이지만, 강의 제목에 나오는 ‘원한감정’이라는 표현도 조금 낯설면서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니체가 말하는 원한감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억울함이나 분노와 어떻게 다른가요? 또 이런 감정이 피해의식이나 종교적 확신과 결합할 때,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시나요?
우선 원한, 혹은 원한감정은 니체가 말하는 Ressentiment(르쌍티망)를 옮긴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억울함, 분노, 상처와는 조금 다릅니다. 억울함이나 분노는 어떤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런 분노는 정의로운 저항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원한감정은 직접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분노가 마음속에 오래 축적되고, 그것이 도덕적 판단의 형식으로 변형된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거나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못할 때, 인간은 상대를 “악한 자”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선한 자”로 해석하려 합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원한의 핵심입니다.
앞서 설명한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강한 자가 좋고 약한 자가 나쁘다는 기존의 가치 질서를 뒤집는 혁명입니다. 강한 자는 악한 자가 되고, 약한 자는 선한 자가 됩니다. 원한은 바로 이 가치 전도의 심리적 동력입니다.
이 점에서 원한감정은 단순한 상처와 다릅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모두 원한의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억울함을 느끼는 사람이 모두 노예도덕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느냐입니다. 상처가 자기 성찰과 정의로운 저항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 선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저들은 악하다”는 도식으로 굳어질 때, 그리고 자기 정체성이 적의 악마화에 의존하게 될 때, 니체가 말하는 원한감정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니체가 이러한 가치 전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지목한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니체는 고대 유대 사제적 전통과 그것을 계승하고 보편화한 기독교가 주인도덕을 뒤집고 노예도덕을 확산시켰다고 봅니다. 니체의 해석에 따르면, 사제적 인간은 약자들의 고통과 원한을 도덕적·종교적 언어로 조직합니다. 가난한 자, 약한 자, 빼앗긴 자, 고통받는 자를 선한 자로 부르고, 강한 자, 지배하는 자, 자기 삶을 긍정하는 자를 악한 자로 규정합니다.
이것을 전적으로 동의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한 측면도 있지만, 니체의 분석을 통해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 안의 특정한 현상을 이해하는 통찰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극우화된 기독교 담론에서는 외부의 적을 먼저 설정하는 방식이 자주 나타납니다. 공산주의자, 좌파, 세속주의자,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진화론자 등 자신들이 보기에 교회를 위협하는 어떤 집단이 먼저 “악”으로 규정됩니다. 그리고 그 악한 세력에게 핍박받는 자신들은 참된 신앙을 지키는 선한 사람들로 이해됩니다. 이때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이 되기보다, 자기 집단의 피해의식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기 쉽습니다.
음모론도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적 확신과 결합합니다. 음모론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저 악한 세력이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의미를 줍니다. 패배감과 분노, 상처와 불안을 하나의 서사 안에 묶어 줍니다. 그리고 종교적 언어가 여기에 결합하면, 그 음모론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영적 전쟁, 순교, 마지막 때의 싸움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억압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편에 있다”는 종교적 확신으로 바뀌면, 매우 강력한 자기정당화가 생깁니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원한감정이 종교적 언어를 통해 도덕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독교 신앙을 원한의 산물로 환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분명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회개의 언어, 약자와 고통받는 자를 향한 연민, 자기 의를 내려놓는 겸손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기독교는 원래 원한의 종교인가?”가 아니라, “왜 어떤 기독교는 원한의 언어에 사로잡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강의에서는 바로 그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니체라는 거울을 통해, 오늘 우리의 신앙이 진실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적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피해의식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함께 성찰해 보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이 흥미롭게 느껴지더라도 철학책이나 고전 강독이 처음인 분들은 조금 부담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 공부 경험이 없는 사람도 이 강의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이 강의를 통해 수강생들이 꼭 가져갔으면 하는 질문이나 감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데카르트나 칸트, 헤겔, 하이데거와 같이 매우 체계적인 철학자들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서양철학의 전통에 익숙할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철학에서 이러한 체계를 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철학이 세워 왔던 모든 가치와 체계들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철학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니체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철학자들보다는 문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니체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곤 합니다. 이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으신 분들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일수록 니체에게서 많은 통찰들을 얻어가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니체에 다 동의하실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그보다는 니체가 말하는 전통 도덕 비판에서 여러분 각자에게 다가오는 어떤 영감 같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애매하게 남아 있던 무엇인가가 조금은 해결되거나 깨뜨려지는 경험들을 하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지점들이 바로 니체가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일종의 영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영감이 여러분들의 삶 앞에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뷰 진행: 박현철
[특강] 원한의 도덕과 음모론의 신앙 살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