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고 견디고 향유하며👐
👀시끄러운데 조용, 한나
회의를 하며 '기도문 쓰기 모임' 기획을 들었을 때, 저의 기도문 경험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건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불렀던 '날마다 우리에게 간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였습니다. 맛있는 간식을 주는 하나님은 정말 좋은 분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목청을 높여 불렀던 것 같습니다. 세 끼의 밥을 먹기 전에도 기도한다며 열심히 불렀던 것 같고요.
키가 조금 자란 어린이 시절에 만난 기도문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었는데요. 어른들 예배 시간에 엄마 옆에 앉아 성경책 뚜껑에 있는 이 기도문들을 또박또박 따라 읽었습니다.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를 읽을 때면 예수님을 죽게한 본디오 빌라도는 나쁜 사람이라며 부르르 떨기도 했고,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를 읽을 때면 ‘밥은 역시 하나님이 주는 걸까’를 떠올리며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사춘기를 막 지난 싸이월드(!) 시절에는 누군가의 사진첩에 있던 기도문을 보며 두근거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라는 글이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사람이 썼다는 ‘평안을 비는 기도'를 보며 이런 평온과 용기, 지혜를 과연 내가 원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했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뭐 대단한 걸 한다고 이런 기도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수첩에 옮겨쓰곤 읽고 기도하며 나름의 마음을 잡으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둘 떠올리다 보니 기도와 함께했던 간절함의 모양이 생각나고, 습관처럼 건조하게 기도했지만 유난히 와 닿았던 특별한 마음, 희미하게 가늠한 전능자의 어떤 속성으로 벅찼던 감정이 생각납니다. 그 반짝이며 떠오르던 찰나들이 지금도 힘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청어람은 다양한 모양의 모임을 선보일 것입니다만, ‘지금 이순간’에만 접할 수 있는 모임을 통해 여러 무용함을 향유하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당장 손에 잡히지 않을 기도를 쓰거나 내 삶을 글로 표현하는 시간이 줄 수 있는 반짝임이 있을 것입니다. 존재에게도 효용성을 묻는 잔혹한 시대에 무용함이 주는 유용함, 그 역설을 맛보며 반짝일 분들을 기다리겠습니다. 함께해요!
떠올리고 견디고 향유하며👐
👀시끄러운데 조용, 한나
회의를 하며 '기도문 쓰기 모임' 기획을 들었을 때, 저의 기도문 경험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건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불렀던 '날마다 우리에게 간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였습니다. 맛있는 간식을 주는 하나님은 정말 좋은 분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목청을 높여 불렀던 것 같습니다. 세 끼의 밥을 먹기 전에도 기도한다며 열심히 불렀던 것 같고요.
키가 조금 자란 어린이 시절에 만난 기도문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었는데요. 어른들 예배 시간에 엄마 옆에 앉아 성경책 뚜껑에 있는 이 기도문들을 또박또박 따라 읽었습니다.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를 읽을 때면 예수님을 죽게한 본디오 빌라도는 나쁜 사람이라며 부르르 떨기도 했고,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를 읽을 때면 ‘밥은 역시 하나님이 주는 걸까’를 떠올리며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사춘기를 막 지난 싸이월드(!) 시절에는 누군가의 사진첩에 있던 기도문을 보며 두근거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라는 글이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사람이 썼다는 ‘평안을 비는 기도'를 보며 이런 평온과 용기, 지혜를 과연 내가 원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했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뭐 대단한 걸 한다고 이런 기도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수첩에 옮겨쓰곤 읽고 기도하며 나름의 마음을 잡으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둘 떠올리다 보니 기도와 함께했던 간절함의 모양이 생각나고, 습관처럼 건조하게 기도했지만 유난히 와 닿았던 특별한 마음, 희미하게 가늠한 전능자의 어떤 속성으로 벅찼던 감정이 생각납니다. 그 반짝이며 떠오르던 찰나들이 지금도 힘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청어람은 다양한 모양의 모임을 선보일 것입니다만, ‘지금 이순간’에만 접할 수 있는 모임을 통해 여러 무용함을 향유하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당장 손에 잡히지 않을 기도를 쓰거나 내 삶을 글로 표현하는 시간이 줄 수 있는 반짝임이 있을 것입니다. 존재에게도 효용성을 묻는 잔혹한 시대에 무용함이 주는 유용함, 그 역설을 맛보며 반짝일 분들을 기다리겠습니다.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