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
🧘♀️까칠한 오지라퍼, 수경
![](https://cdn.imweb.me/upload/S202111302f58d7e8f55a9/9c9a077d1463a.jpg)
얼마 전 처음 만난 분과 함께 꽤 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길을 걸으며 어색하게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되었었는데 그러다가 서로의 종교를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무교’라고 먼저 밝힌 그는 “저는 개신교인이에요”라는 저의 말에 ‘아...’ 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반응을 했죠. 그 반응 후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흘러갔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그 대화가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그의 ‘아...’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왜 그 반응에 움찔하여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을까? 우리가 종교에 관해 대화를 이어갔다면 어떤 말들이 오갔을까? 이런 질문이 맴돌았죠. 특히 저의 ‘움찔’이 인상 깊었습니다. 한때 열심히 ‘노방전도’를 하며 복음을 소개하던 제가 어쩌다 ‘움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복음이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다만, 종교로서 교회가 보여준 모습이 저를 ‘움찔’하게 할 뿐이죠.
너무 야박한 평가일까요? 최근 발표된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에 따르면, 종교가 현대인의 생활과 가치관에 끼치는 영향이 꾸준하고 단호하게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줄어드는 이유로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39.7%로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28.1%)’보다 높게 나와 이제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 ‘노관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걸 체감하게 합니다. 본인이 믿고 있는 종교를 제외하고 다른 종교의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도 주목할 만합니다. 불교(32.9%)가 가장 높았고, 그 뒤를 가톨릭(29.9%)이 차지했는데요. 개신교(6.8%)는 유교(11.3%)와 샤머니즘(3.9%) 사이인 6.8%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제가 그 대화 상대에게 종교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냈더라도 씨알도 안 먹혔을 뿐 아니라, 아예 대화 자체가 중단이 되었을 확률이 높았던 셈이죠.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에 관한 분석은 이미 넘치므로 굳이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종교(특히 개신교) 소멸’로 향해가는 시대에 어떤 신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어떻게 공유하면 좋을까요?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와 관련하여 최근 인상 깊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보수 개신교 영역에서 ‘동성애 쓰나미’가 몰려온다며 이에 대비하게 위해 ‘거룩한 방파제’를 세워야 한다는 글이었죠. 어떤 이상한 사람의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 꽤 유명한 대형 교회 목사님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말문이 막혔더랬습니다. 어떤 존재를 ‘쓰나미’라는 재앙으로 인식하고 막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신앙의 언어 앞에서 저도 이렇게 말문이 막힌데 교회 바깥의 존재들에게는 어떻게 여겨질까요? 그런가하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성소수 쓰나미에서 서핑을 타고 계실 거야!”라며 혐오의 말에 맞서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런 말들을 보며 ‘방파제 신앙’과 ‘서핑 신앙’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방파제는 어느 집단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는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를 가름으로써 다른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죠. 서핑은 어떨까요? 다소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변화의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겠죠. 예수님이라면 방파제에 계실까요, 서핑을 하실까요? 판단은 각자에게 맡기겠습니다. 다만, 종교가 피조 세계와 이웃에게 기여하길 원한다면 방파제를 열어 변화에 몸을 내어 맡기고 함께 흐름을 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핑 기술이 중요할 텐데요. 파도의 흐름을 잘 타야하는 ‘서핑 기술’이라는 단어를 제 나름대로 번역해 본다면,‘듣기와 말 걸기’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잘 들어야 하지만, 인간 사회의 변화가 알려주는 바도 잘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종교. 그런 종교가 결국 ‘말 걸기’도 잘 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오늘날 개신교가 처한 위기의 본질은 이 듣고 말 걸기 능력의 상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어람에서 하는 활동은 다양한 방향성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어떻게 듣고 이해할 것인가,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에 관해 배우는 과정입니다. 특히 이번 주부터 함께 읽기 시작한 <리딩 더 타임스>와 어디에도 머물 수 없는 세대를 위한 신앙에 관해 함께 이야기할 <청어람 살롱>은 그런 청어람의 지향점을 잘 드러낸 프로그램입니다.
변화하는 세계를, 그 변화 가운데 일하시는 주님의 뜻을, 자꾸 망가져가는 피조세계의 신음 소리와 동료 시민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하며 소통하고 싶으신가요? 저희 모임에 한 번 참여해 보세요. 여러분을 모임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https://cdn.imweb.me/upload/S202111302f58d7e8f55a9/27469c5689e69.jpg)
먹구름이 드리워도 씩씩하게 걷고 또 걸었습니다.
함께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
🧘♀️까칠한 오지라퍼, 수경
얼마 전 처음 만난 분과 함께 꽤 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길을 걸으며 어색하게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되었었는데 그러다가 서로의 종교를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무교’라고 먼저 밝힌 그는 “저는 개신교인이에요”라는 저의 말에 ‘아...’ 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반응을 했죠. 그 반응 후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흘러갔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그 대화가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그의 ‘아...’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왜 그 반응에 움찔하여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을까? 우리가 종교에 관해 대화를 이어갔다면 어떤 말들이 오갔을까? 이런 질문이 맴돌았죠. 특히 저의 ‘움찔’이 인상 깊었습니다. 한때 열심히 ‘노방전도’를 하며 복음을 소개하던 제가 어쩌다 ‘움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복음이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다만, 종교로서 교회가 보여준 모습이 저를 ‘움찔’하게 할 뿐이죠.
너무 야박한 평가일까요? 최근 발표된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에 따르면, 종교가 현대인의 생활과 가치관에 끼치는 영향이 꾸준하고 단호하게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줄어드는 이유로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39.7%로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28.1%)’보다 높게 나와 이제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 ‘노관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걸 체감하게 합니다. 본인이 믿고 있는 종교를 제외하고 다른 종교의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도 주목할 만합니다. 불교(32.9%)가 가장 높았고, 그 뒤를 가톨릭(29.9%)이 차지했는데요. 개신교(6.8%)는 유교(11.3%)와 샤머니즘(3.9%) 사이인 6.8%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제가 그 대화 상대에게 종교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냈더라도 씨알도 안 먹혔을 뿐 아니라, 아예 대화 자체가 중단이 되었을 확률이 높았던 셈이죠.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에 관한 분석은 이미 넘치므로 굳이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종교(특히 개신교) 소멸’로 향해가는 시대에 어떤 신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어떻게 공유하면 좋을까요?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와 관련하여 최근 인상 깊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보수 개신교 영역에서 ‘동성애 쓰나미’가 몰려온다며 이에 대비하게 위해 ‘거룩한 방파제’를 세워야 한다는 글이었죠. 어떤 이상한 사람의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 꽤 유명한 대형 교회 목사님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말문이 막혔더랬습니다. 어떤 존재를 ‘쓰나미’라는 재앙으로 인식하고 막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신앙의 언어 앞에서 저도 이렇게 말문이 막힌데 교회 바깥의 존재들에게는 어떻게 여겨질까요? 그런가하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성소수 쓰나미에서 서핑을 타고 계실 거야!”라며 혐오의 말에 맞서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런 말들을 보며 ‘방파제 신앙’과 ‘서핑 신앙’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방파제는 어느 집단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는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를 가름으로써 다른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죠. 서핑은 어떨까요? 다소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변화의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겠죠. 예수님이라면 방파제에 계실까요, 서핑을 하실까요? 판단은 각자에게 맡기겠습니다. 다만, 종교가 피조 세계와 이웃에게 기여하길 원한다면 방파제를 열어 변화에 몸을 내어 맡기고 함께 흐름을 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핑 기술이 중요할 텐데요. 파도의 흐름을 잘 타야하는 ‘서핑 기술’이라는 단어를 제 나름대로 번역해 본다면,‘듣기와 말 걸기’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잘 들어야 하지만, 인간 사회의 변화가 알려주는 바도 잘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종교. 그런 종교가 결국 ‘말 걸기’도 잘 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오늘날 개신교가 처한 위기의 본질은 이 듣고 말 걸기 능력의 상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어람에서 하는 활동은 다양한 방향성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어떻게 듣고 이해할 것인가,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에 관해 배우는 과정입니다. 특히 이번 주부터 함께 읽기 시작한 <리딩 더 타임스>와 어디에도 머물 수 없는 세대를 위한 신앙에 관해 함께 이야기할 <청어람 살롱>은 그런 청어람의 지향점을 잘 드러낸 프로그램입니다.
변화하는 세계를, 그 변화 가운데 일하시는 주님의 뜻을, 자꾸 망가져가는 피조세계의 신음 소리와 동료 시민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하며 소통하고 싶으신가요? 저희 모임에 한 번 참여해 보세요. 여러분을 모임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먹구름이 드리워도 씩씩하게 걷고 또 걸었습니다.